[다큐멘토링] 장수는 많았지만 장수가 없었다

이남석 발행인 2023. 7.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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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㉘
선조가 배치한 고위 공직자 셋
전략은 안중에 없고 기싸움만
‘한 수’ 더 놓는다는 게 낭패
전장에서 필요한 건 ‘수’ 아냐

선조가 개성으로 몽진했던 1592년 5월초. 선조는 조선을 대표하는 장수들에게 '임진강'을 사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이는 김명원, 신할, 한응인 셋이었다. 여기에 유극량이란 장수까지 합세했으니 사실상 4명이 임진강 방어를 맡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왜군이 앞에 나타나자 '갑론을박'을 벌이며 못난 모습만 노출했다. 전장戰場에서 필요한 건 지도자의 수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똑똑한 리더 한명이 변변치 않은 리더 10명 몫을 하게 돼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임진왜란 당시의 무대를 임진강 쪽으로 옮겨보자. 선조가 1592년 4월 30일 개성으로 몽진을 단행하면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수비를 맡겼다. 김명원은 5월초 왜군을 보자마자 겁을 먹고 임진강으로 도망쳐 왔다. 임금이 있는 개성으로 향할 면목도,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임진강 지역에 머물면서 패한 이유를 장계로 올리고 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의정 유홍의 방패 역할로 그는 패전의 죄를 용서받고, 도원수라는 병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경기ㆍ황해ㆍ평안 3개도의 병마를 총괄해 임진강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았다. 선조는 김명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 북병사 신할申硈에게도 통어사統御使라는 벼슬을 주면서 임진강을 사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여기에 죽령에서 맥없이 물러난 조방장 유극량도 임진강 방어선에 합류했다.

선조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수'를 더 놓는다는 것이 그만 낭패를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선조는 명나라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한응인을 제도순찰사로 임명했다. 그다음 평안도 압록강변에서 국경을 지키던 병사 '강변정병 3000명'을 이동시켜 임진강에서 왜적을 막을 것을 명했다. 그러면서 선조는 한응인에게 "무능한 도원수 김명원의 지시를 받지 말라"는 하명을 내렸다.

강변정병 3000명이라면 당시 조선에서는 최강의 전력이다. 오랫동안 국경을 지켰기 때문에 강물에도 익숙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임진강을 지키는 데 제격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지도자감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임진강에서 최후를 맞았다.

당시의 장수감을 논한다면 그나마 유극량이 1순위, 2순위는 김명원, 3순위는 신할이고, 한응인은 꼴찌였다. 그래봤자 그들은 이미 장수감으로는 '수준 미달'이 아닌가. 게다가 명령 체계마저 엉터리다. 천자문을 읽는 당시 학동조차 '승리'보다는 '패배'에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한응인이 높은 직책을 받은 건 단지 명나라에 다녀왔다는 권위 덕이었다. 그런데도 선조는 평안도 강변정병을 한응인에게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좌의정 윤두수는 "한응인의 얼굴장에 복기福氣가 있으니 반드시 복장福將이 되어 성공할 것"이라며 세치 혀를 놀렸다.

장수를 전장戰場에 보낼 때에 능력을 논하지 않고 관상을 말하는 건 당시로서도 웃음거리였다. 윤두수는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무 말 잔치' 수준의 말도 거리낌 없이 꺼내는 그런 인물이었다.

어쨌든 선조는 '임진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왜군의 북진을 막으라며 세명의 고위 공직자를 배치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기싸움만 벌일 뿐, 정작 중요한 방어 전략이나 전투력 점검은 안중에 없었다.

신할은 "대장이 어찌 남의 절제를 받으랴"며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김명원은 한강에서 싸우지도 아니하고 도망친 인물이라 부하들에게 신임을 잃은 지 오래다. 게다가 한응인은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말라는 어명까지 받은 당당한 장사 아니냐"고 뻐기고 있었다. 세명의 장수가 반목해 병권을 다투는 꼴이 가관도 아니었다.

마침내 임진강 남쪽까지 진격한 왜군은 진을 치고 건너올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김명원은 강 북안에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눠 각 여울목을 지키게 했다. 또 강가에 있는 선박을 모조리 거둬 적병이 타고 건널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임진강 방어를 10여일간 했는데, 적병이 퇴군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번엔 왜군이 임진강을 놓고 후퇴하는 척하자 신할과 한응인은 '서로 먼저 진격하겠다'며 아우성을 쳤다. 특히 한응인은 개성에서 임진강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장병들을 '임진강 전투'로 몰아넣고 있었다.

실제로 적병이 머물던 장막을 거두고 군기를 마차에 싣고 퇴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모한 신할은 김명원에게 "적이 못 견디어 달아나오.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였으니 급히 추격합시다"고 주장했다.

김명원은 이렇게 답했다. "필시 그놈들이 강을 건너올 수가 없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오. 그만하고 달아날 놈들이 아니오. 뒤에는 군사도 많고 군량도 많은데 달아날 리가 있소?" 이는 김명원이 전세를 제대로 읽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는 강을 건너가 적을 때려 부술 용기가 없었다. 김명원의 말에 신할이 대꾸했다.

"대감. 도망하는 적병을 가만히 보고만 앉아 있겠다는 말이오?" 경기감사 권징도 "급히 쳐서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함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오"라며 신할의 의견에 동조했다.

권징의 찬성을 얻은 신할은 기운을 더 내 "달아나는 적을 그대로 놓아 보내면 무슨 면목으로 성상을 대할 것이오. 대감은 여기 계시오. 소인은 적을 치러 가겠소"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권징 역시 신할의 뒤를 이어 쫓아 나왔다.

신할은 도원수의 승낙 없이는 움직이기를 원치 않는 유극량까지 재촉했다. "영감, 속지 마오. 적이 달아나는 게 아니라 무슨 비책이 있는 것 같소. 함부로 갔다가는 큰코다칠 것이오."

드라마 '징비록' 속 선조의 모습.[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자 신할은 유극량에게 "두려워 겁내는 장수는 엄책하고 참수할 것이오"라며 윽박질렀다. 유극량은 기가 막히다는 투로 "소인이 소싯적부터 종군하였거늘,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며 선봉에 나서겠다는 뜻을 비쳤다.

신할은 의기 당당하게 임진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김명원은 신할이 도원수인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걸 보면서 "저녁이 채 오기도 전에 적이 강을 건너올 수도 있겠군"이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사실 도원수인 김명원은 신할과 권징의 행동을 명령으로 누를 수 있었다. 극단적인 경우, 군법을 시행해 목을 벨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품, 한강에서 패주한 수치는 도원수의 권위를 부릴 의지까지 상실케 만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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