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담긴 시는 삶이자 정체성"…시인, 가수, 교사로서 나누는 모국어 사랑
네덜란드 틸버그의 소극장에서 아름다운 재즈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관객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여성이 청아하면서도 울부짖는 듯 부르는 노래,
분명 장르는 재즈인데, 어딘지 모르게 한국적인 정서가 서려 있습니다.
우리말 가사를 읊조리면서 무대를 장악합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뮤지컬 배우 출신의 이린아 씨!
2년 전 재즈를 공부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유학 온 린아 씨가 선보인 단독 공연입니다.
[이대얼 / 관객 : 한국적인 감성이잖아요. 한국적인 부분에서도 과거의 감성인데 그걸 '비나이다, 비나이다'로 시작하다가 재즈로 넘어가는 부분이 너무 멋있더라고요.사람들 다 집중하면서 들었고. 그분들은 사실 한국말 잘 모르니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데 바로 몰입하게 되는 게 너무 멋있더라고요.]
실험적인 재즈 음악부터 한국어로 노랫말을 붙인 자작곡까지, 린아 씨의 무대를 본 관객들은 국적과 성별, 나이를 넘어 다양한 울림을 느꼈다는데요.
[김나현 / 관객·지인 : 저도 해외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가사도 한국말이고 그러니까 조금 더 와 닿더라고요. 그 노래 듣는데 린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을지 그 마음이라든가 느낌이라든가 느껴져서 사실 되게 울컥했어요.]
[박수진 / 피아노 연주자·동료 : 유럽인들에게 우리나라 문화와 정서를 잘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 같아요.]
[파울린 반 스카이크 / 담당 교수 : 아주 독특한 예술가예요. 재즈 레퍼토리와 한국 전통 레퍼토리를 함께 융합하는 아주 특별한 음악을 해요. 제 생각에 린아 씨는 굉장한 음악가예요.]
한국에서 뮤지컬 배우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노래도 잘하고 멜로디에 한국어 가사까지 잘 붙이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린아 씨가 공연에서 우리말 노래를 한 곡 이상씩 넣는 건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사실 린아 씨는 2018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입니다.
뮤지컬 배우로서 노랫말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고 합니다.
[이린아 / 시인·한글학교 교사 : 제가 어떻게 보면 뮤지컬 하고 배우로 활동하고 하면서 마음속에는 계속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본을 읽으면서 대본들이 다 '시' 같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분장실이나 이런 데서 끄적끄적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렇게 뮤지컬 배우이자 시인으로서 활동하면서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강해졌는데요.
짧은 시간이지만 유학 생활을 하면서 모국어의 소중함이 더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그 때문에 1년 전부터는 한글학교 강사라는 새로운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이린아 / 시인·한글학교 교사 : 네덜란드에 살기 시작하면서 모국어로 생활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내가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나에게 무척 큰 힘이 되고, 그리고 나의 역사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이 나라에서 적응하는 것도 되게 중요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아주 도움이 된다는 걸 느끼게 되면서 아 이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꼭 잘 가르쳐주고 싶다….]
유학생으로서 바쁜 생활에도, 토요일마다 3시간씩 투자해 네덜란드 동포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이지안 / 한글학교 학생 : 부드럽고 정확한 방법으로 잘 가르쳐주시는 것 같아요. 토요일에는 한글학교도 가고 이린아 선생님과 공부도 해서 너무 즐겁고 좋아요.]
선생님 이린아 씨가 학생들에게 내주는 대표적인 숙제는 정기적인 일기 쓰기라는데요.
일기를 쓰다 보면 우리말 어휘도 풍부해지고 결국, 시적 심상도 자연스럽게 모국어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이린아 / 시인·한글학교 교사 : 한글을 자주, 자연스럽게 내 일상을 한글로 쓰는 연습을 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전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일기를 (숙제로) 많이 주는 편이에요. 한국어로 일상언어를 계속하면 한국에서의 어떤, 저희만 아는 그런 문화적인 느낌을 계속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조세현 / 동료교사 : 저도 같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선생님이 되게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린아 선생님 4학년 학령에 맞게 즐겁게 수업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김희숙 / 에인트호번 한글학교장 : 처음에 아이들을 맡았을 때는 아이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걸 수업을 많이 하셨어요. 선생님하고 유대관계를 넓히는 수업을 많이 하셨고, 그러고 나서 글쓰기 작업을 많이 하셨어요.]
누군가는 여러 직업을 가진 린아 씨에게, 왜 굳이 그리 바쁘게 사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린아 씨에게는 모든 활동이 각각 서로 다른 도전이 아닌, 일맥상통한 일이라는데요.
생각해서 낸 말은 곧 시이고 시를 부르면 노래가 되고 그걸 몸짓으로 표현하면 곧 연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린아 / 시인·한글학교 교사 : 시는 글자 그대로 행동하고 있고 글자를 제가 몸소 행동하면 연기가 되고 그걸 몸소 노래하면 노래가 되거든요. 다 큰 '시'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게 직업이라기보다 정체성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제가 갖고 있는 시를 이럴 때는 이런 방법으로 풀고 저럴 때는 저런 방법으로 풀면서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저에게 가장 큰 목적인 것 같아서 계속 그렇게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소통할 것 같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곧 '시'라고 생각한다는 린아 씨.
앞으로도 그런 '시'적인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풍성히 나누고 소통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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