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노예’로 3년 감금생활 “풀 뜯어 먹다 죽는 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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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올 때마다 부산진시장이나 중앙시장을 찾아가요. '혹시라도 영화숙에서 지낸 옛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 난 한 눈에 알 것 같은데' 싶어 한 바퀴 돌아보는 거죠. 배가 고파 풀이란 풀은 다 뜯어 먹던 그때를 생각하면 따뜻한 칼국수라도 한 그릇 사주고 싶습니다."
부모님, 동생들과 밥 굶을 일 없던 평범한 집 딸이었지만 '아가씨 장사'로 생계를 꾸리는 부모가 싫어 홀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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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 집단수용시설 피해 신고
- “부산진역서 영문 모른 채 납치돼
- 5평 남짓 방에 15~20명씩 ‘칼잠’
- 강냉이죽 먹으며 매일 강제노역
- 그 아이들 만나 칼국수 사주고파”
“부산에 올 때마다 부산진시장이나 중앙시장을 찾아가요. ‘혹시라도 영화숙에서 지낸 옛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 난 한 눈에 알 것 같은데’ 싶어 한 바퀴 돌아보는 거죠. 배가 고파 풀이란 풀은 다 뜯어 먹던 그때를 생각하면… 따뜻한 칼국수라도 한 그릇 사주고 싶습니다.”
진순애(67) 씨는 소녀의 몸으로 노예와 같은 삶을 감내해야 했다. 1960년대 부산 최대 부랑아 시설 ‘영화숙’에 붙잡힌 그는 ‘어린이’도 ‘인간’도 아닌 그 이하의 존재로 3년을 살아냈다. 혹독한 훈련, 날아드는 폭력, 부실하기 짝이 없는 끼니는 그의 삶을 고통으로 채웠다. 진 씨는 지난 4월 부산시가 지역 내 집단수용시설 피해사실을 접수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신고를 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여성 피해자다.
1956년 경주 출생인 진 씨는 열한 살 겨울 즈음 부모님을 떠나 부산으로 왔다. 부모님, 동생들과 밥 굶을 일 없던 평범한 집 딸이었지만 ‘아가씨 장사’로 생계를 꾸리는 부모가 싫어 홀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부산진역에서 진 씨는 또래들과 어울리며 방황했다. 연고 없는 부산엔 신세 질 곳이 없었지만 영화숙에 ‘납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뭔가 덥썩 잡더니 냅다 차에 실었다. 검은 옷의 남자 3명이었다. 차에는 먼저 붙잡힌 또래들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간 곳에선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게 시켰다. 부모님에게 연락할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찾는 일은 없었다. 진 씨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를 안 찾는구나 원망했지만, 실제 연락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고 했다.
진 씨는 여성소대에서 3년 이상 살았다. “5평 남짓한 방 한 칸에 15명, 20명씩 몰려 있었어요. 방이 좁으니 내 머리와 옆 사람 다리가 한 방향으로 눕는 ‘칼잠’을 자야 했는데, 그마저도 좁아서 서로 딱 붙다시피 했어요. 벽돌 방이니 겨울에는 엄청 춥죠. 그런 방이 소대에 7, 8개 있었어요.” 소대장 등 관리자는 여성소대원과 부적절한 행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행동은 10대 초반 여자 아이들로 가득한 방 안에서도 자행됐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제식훈련과 구보도 피할 수 없었다. 작은 발동작이라도 틀리면 어김없이 손찌검이 기다렸다. 구보를 마친 뒤엔 근처 웅덩이에 세숫대야를 놓고 여러 명이 한 번에 씻는데, 물이 더럽다 보니 옴 같은 피부병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영화숙이 자리한 서구 장림동(현 사하구 신평동) 일대는 과거 바닷물이 차 오르는 습지이면서 부산시의 폐기물 매립장이 있었다. 밭일과 같은 강제노역도 매일같이 이어졌다. 끼니라곤 건더기 없는 된장국이나 강냉이죽 정도가 전부였다. “노예나 다름 없었다. 배가 고파 근처 풀이란 풀은 다 뜯어 먹었다. 또래 한 명은 풀을 잘못 뜯어 먹고 채독에 걸려 죽었다. 사람이 죽으면 뒷산에 가서 묻어버렸다”고 진 씨는 말했다.
진 씨는 고참이 되고서야 탈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거리를 떠돌아야 했던 그는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한 끝에 자수성가했지만, 결국 부모님과는 살아생전 재회하지 못 했다. 진 씨는 “과거 내가 겪은 고통이 그 시절을 산 또래 친구들을 위한 진상규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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