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고 억울한 노동자들의 동반자, 안내자, 지도자였죠”
오글 목사가 육성한 청년 노동자
부당해고 법정 투쟁 7년 끝난 뒤
“노동운동 하지 않으면 안될 팔자
피할 수 없다면 운명 받아들인다”
노동자 상담에 본격적으로 헌신
해고된 동일방직 여공들 다독이고
노동자들 고민·고통 나누던 버팀목
1974년 이른바 ‘인민혁명당’ 사건의 사형수 8명 등 피해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했던 조지 오글 목사는 미국 감리교단에서 한국의 산업 현장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라고 파송한 선교사다. 오글 목사는 1960년부터 인천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교회가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야 한다”며 산업선교 활동을 했다. 이때 인천의 유수한 목사들이 추천한 청년 노동자 12명을 선정해 신학과 노동에 관련된 여러 과정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평신도 지도자’로 육성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한국베아링 공장에 다니던 20대 중반의 노동자 황영환이었다
황영환은 1960년 군 제대하고 부평에 있던 한국베아링 생산직 노동자로 취직했다. 종업원으로서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회사로부터 모범근로자 상을 받고 조장으로도 임명됐다. 또한 ‘평신도 지도자’로서 노조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대의원에 선출되고 회계감사 등 임원이 되기도 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 뒤 황영환은 자기가 다니던 한국베아링 공장 조합원들에게 그 죽음을 알리고 조의금을 모금했다. 1인당 20원 내지 30원을 자발적으로 거출해 당시 한 달 봉급에 상당한 4만원을 모았다. 이 조의금을 노동조합을 통해 전국금속노동조합에 전달하라고 했는데 조합 지부장이 중간에서 횡령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따지는 황영환은 오히려 가짜뉴스를 퍼트린다고 중앙정보부에 잡혀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곧이어 회사는 야간 근무 중 조장인 황영환이 자기 책상에서 졸았다면서 해고한다.
부당해고라고 진정해 노동청에서 복직시키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회사가 무시하니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다시 법원에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해고된 지 1년6개월 만에 서울고등법원의 해고무효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회사가 상고한 대법원에서는 작업 중 졸았다는 장소가 작업장 이탈인지를 확인하지 않았다며 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고등법원에서는 작업장을 이탈해서 졸은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해서 회사가 구체적으로 손실을 보지도 않았다며 황영환의 손을 재차 들어줬다. 그러나 대법원은 다시 고등법원에 되돌려 보낸다. 결국 세 번째 고등법원은 대법원에 항복하고 황영환의 해고가 정당하다고 번복하는 판결을 한다. 한 사건을 고등법원, 대법원이 세 번이나 심리한 기록을 세운 이 소송은 7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황영환의 인생 방향은 엄청난 각도로 휘어져서 운명에 떠밀리듯이 한길을 걸어가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팔자이고 운명이다. 피해갈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이 독백 같은 다짐은 이후 똥물을 뒤집어쓰고 해고된 동일방직 여공들을 다독이면서 했던 말이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황영환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부여한 사명은 힘없고 억울한 노동자의 동반자, 안내자, 지도자로 가는 길이라 결심했고, 어느 해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딴 길로 가지 않고 그 길을 걸었다.
황영환은 자신의 경험과 평신도 지도자 훈련에서 받은 노동 관련 학습을 정리해 노동자 상담에 본격적으로 헌신했다. 우선, 해고 투쟁 기간에도 인천 산업선교회 실무자로 봉사하면서 동일방직, 반도상사, 삼원섬유 등에서 비인간적인 탄압을 받던 수많은 노동자의 버팀목으로 고민과 고통을 나눴다. 어떤 때는 노동자가 구속되는 과정에서 같이 수감돼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공치사 한마디 없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했다.
오글 목사의 ‘평신도 지도자’로서 황영환의 실천적 활동 가운데 하나가 부평의 노동자교회인 광야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청년 교인들과 지역 노동자들이 합심해서 노동학습 공간을 마련했고 수많은 노동자를 교육했다. 나 또한 1982년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돼 고인의 상담과 지도를 받아 9년 만에 복직하게 됐다.
지난해 가을 강화도 교동면에 폐교된 난정초를 리모델링해 건립한 인천교육청 평화교육원을 고인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다. 난정초는 바로 그가 다녔던 학교다.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논 마지기나 있는 넉넉한 농부였던 아버지가 한순간에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소년은 인천 만석동 판잣집으로 옮겨와 부두에서 화물선에서 석탄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자가 됐다. 석탄을 짐통에 담아 배 난간과 땅바닥을 연결한 수십미터 좁은 가교를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데 흡사 출렁다리와 같이 탄력이 있어 매우 위험한 노동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험한 세파를 헤치고 평생 살아왔지만 노동자로서 자존심을 남아 있는 우리에게 무겁게 남겨주고 지난 칠월 초이튿날 멀리 떠났다.
박남수/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 전국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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