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장학금으로 자란 소년이 교황청 장관이 되기까지

임지선 기자 2023. 7. 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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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식 추기경 ‘라자로 유흥식’ 출간 북콘서트
추기경의 삶·사회 향한 소신 등 담아
“자비·사랑 있어야 세상 바뀐다”
2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라자로 유흥식’ 북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집안에 천주교 신자는 한 명도 없었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논산 대건중학교를 다닌 소년은 종교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고자 했지만 원칙적으로 세례를 받은 지 3년이 지나지 않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표현대로 “하느님의 손길이 도와” 신입생 수가 예상보다 부족했고, 그는 추천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 한국인 성직자 중 최초로 교황청 장관이 된 유흥식 추기경의 이야기다. 최근 번역 출간된 <라자로 유흥식>(바오로딸)은 교황청 국무원 소속 사제인 프란치스코 코센티노 신부가 질문하면 유 추기경이 답변하는 형태로 정리된 책이다. 유 추기경의 삶과 천주교 성직자로서의 제언 등이 담겨 있다.

유 추기경은 책에서 처음 주일미사를 간 계기 등을 진솔하게 언급한다. 고등학생 시절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신자들이 마련해준 장학금을 받은 그는 “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성당에 가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든 성심성의껏 하는 청년이었다. 중학교를 매일 8㎞ 걸어서 가야 했지만 비가 오거나 추워도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다. 새벽 미사도 빠지지 않았다. 지저분한 학교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세례받은 지 3년이 지나야 한다’는 규칙에 맞지 않았는데도 신학교 입학 추천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특유의 성실함이 있었다. 그는 이 일화를 통해 “규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삶이기에, 매사에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두루 살펴보아야 함”을 배웠다고 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 추기경은 성직자 징계 처분에 관여한다. 방한 중인 유 추기경은 22일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북콘서트를 열어 “법이 부족해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느냐. 천만의 말씀이다”라며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사람 마음속에 자비가 들어가고, 사랑이 들어가고, 에수님이 들어가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했다.

성실하고 반듯한 막내아들이 신학교 진학을 말했을 때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밤낮을 울었지만 아들의 진정성에 끝내 고개를 끄덕였고 나중엔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고교시절 유흥식 추기경(가운데). 바오로딸 제공
유흥식 추기경의 첫 미사 집전. 바오로딸 제공

교회 내·외부 어느 쪽을 향해서든 유 추기경은 ‘사랑과 경청’을 강조한다. 그는 사제를 향해 “먼저 친교의 사람”일 것을 강조한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거부하는 현상을 두고도 천주교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편에서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듯합니다. (…) 그들이 관심 갖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책의 마지막 장 ‘오늘날의 교회에 관한 열 가지 열린 질문’에선 사회를 향한 유 추기경의 뚜렷한 소신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사회의)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교회는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사회와 개인의 양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할 수 있는 주요한 기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저의 이런 태도를 보고 ‘빨갱이 주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저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웃어넘겼습니다”라고 말했다.

유 추기경은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교회가 아직도 남성 중심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 다스리는 직무와 관련해서 더 많이 참여시키는 등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라자로 유흥식> 바오로딸 제공.

남북관계에 관심이 높은 그는 책에선 짧게만 언급했다. “서로를 좌파와 우파로 갈라서 보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에 건설적인 대화를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 책은 올해 초 이탈리아에서 ‘우리 시대의 증인들’ 총서의 일환으로 출판된 책을 번역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추천사를 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 추기경을 향해 “다정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이라고 표현하며 “권위주의 타파와 ‘탈중앙화’가 필요한 우리는, 동양의 영적이고 교회적인 삶의 방식을 배우면서 우리의 신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2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라자로 유흥식’ 북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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