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또 추모 이어진 한국 사회···“남 일 같지 않아” 장대비 뚫은 발걸음들

전지현 기자 2023. 7. 23. 17: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 현장에서 23일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장대비가 내린 23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 상가 골목 입구. 하경씨(25)는 쓰고 있던 우산을 툭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난 21일 이 근처에서 벌어진 흉기 난동으로 숨진 20대 남성 A씨를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차려둔 추모공간 앞에서였다. 그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10초간 묵념했다. 다시 우산을 집어든 하씨의 눈시울이 붉었다. 하씨는 “최근 초등학교 교사께서 돌아가신 것도 그렇고, 마음 아픈 소식이 왜 이렇게 많은 지 모르겠다”며 “이렇게 묵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며칠 사이 사회에는 비보가 잇따랐다. 번화가 한복판에서 흉기난동으로 행인들이 다치거나 숨졌고, 초등교사가 학교에서 극단선택을 했고, 해병대원이 수해 실종자를 수색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사건의 성격도 사람도 장소도 모두 달랐지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민들은 각각의 사건사고에 대해 “남 일 같지 않다”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마음을 공통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당신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며 고인들을 추모하는 목소리가 주말 내내 온·오프라인에서 이어졌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무차별 흉기난동 사건 현장에서 23일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하씨가 찾은 신림동 추모공간은 ‘묻지마’ 흉기난동이 있던 사건현장 인근 공실 상가 앞에 마련됐다. 초록테이프로 둘러진 공간에 시민들이 가져다놓은 조화와 포스트잇이 빼곡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부디 평안하시길 빈다” “억울한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은 것 같다. 편히 쉬세요” 등이 적혀 있었다.

근처에서 타로가게를 운영하는 박종구씨(59)는 추모공간이 비에 젖지 않도록 전날 차양을 설치해두기도 했다. 박씨는 “장사를 생각하면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너무 안타까웠다. 꽃이나 조의금을 두고 가는 사람들이 사건 당일 밤부터 있었다”며 “추모객들이 비라도 맞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최근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 때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누구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고 안타까움을 나눴던 것처럼 이날 만난 시민들은 ‘길거리’라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벌어진 참사가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신림동에 40년 넘게 거주한 이모씨(59)는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말이 되냐”며 “누구든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피해자가 자식같은 나이대라 더 말이 안 나온다”고 했다.

해병대원들이 19일 경북 예천 호명면에서 집중호우와 산사태 실종자를 수색하다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동료 해병대원을 수색하고 있다. 예천|권도현 기자

연이은 안타까운 죽음에 시민들은 그 뒤에 얽힌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내기도 한다. 경북 예천에서 지난 19일 실종자 수색 중 급류에 휩쓸려 숨진 고 채수근 상병(20)의 죽음에 대해선 ‘자식을 군대에 보내 본 가족’으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비통해하는 시선들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보여주기식 수색작업에 임하거나 장병 보호에 안일한 군대의 문제를 짚는 시선도 있었다. 현역 군인인 김모 병장(22)은 “또래이고, 같은 군인 신분이라 더 마음이 쓰인다”며 “민간인이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군대에서 신경을 조금만 써줘서 구명조끼를 착용했다면 불미스러운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린이와 어머니가 23일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에서 지난 18일 숨진 채로 발견된 교사를 추모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20대 교사 B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앞에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B씨의 죽음은 선생님들이 한데 모여 “교사들의 생존권을 보장해달라”고 외치게 된 기폭제가 됐다. 현재 교육청·경찰 등이 B씨의 사망원인 등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한편, 교육계에서는 B씨가 학급 내 학생 간 갈등으로 인해 과도한 학부모 민원에 시달렸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추모를 위해 학교를 찾은 각지의 현직 교사들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며 벽에 붙은 추모 포스트잇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차가 오래된 선생님들은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분향소를 찾기 위해 강원 춘천시에서 왔다는 20년차 초등교사 이모씨도 추모를 마친 후 “미안하다”고 포스트잇에 적었다. 이씨는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고, 앞으로 부끄럽지 않고 싶다”며 “앞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함께하자고 얘기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23일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에 지난 18일 숨진채로 발견된 교사를 추모하기 위해 붙여진 포스트잇. “나는 당신입니다. 편히 쉬세요”라는 글귀가 보인다. 전지현 기자

예비 교사나 저연차 교사들은 B씨의 죽음에 대해 “왜인지 알 것 같기에 슬프다”고 했다. 사범대를 다니고 있는 안서영씨(22)는 “돌아가신 선생님과 한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며 “먼 누군가가 아닌, 아는 언니에게 벌어진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안씨는 “선생님으로서 못다 피운 꿈 말고도 하고 싶은 것 다 하시면서, 훨훨 날아가시라”고 포스트잇에 썼다고 했다.

궂은 날씨가 이어진 이날 낮 12시30분부터 10분 간 교내에 차려진 분향소를 다녀간 추모객은 30여명에 이르렀다. 학교 앞 사거리에는 검은 복장에 흰 꽃을 든 이들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서울 강남서초교육지원청에 마련된 분향소는 28일까지 연장 운영하기로 했지만, 이 초등학교에 차려진 분향소는 이날을 마지막으로 철거된다. 한 교사는 “여기 분향소가 마지막이라는 것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화환에 달려 엉켜 있는 리본들을 연신 정리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