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군인을 공짜 막일꾼으로 부리는 나라
대민지원 환경 바뀐게 없어
재난관리 훈령 두루뭉술해
원칙·보상 없는 차출 반복
끝나지 않는 장마처럼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지난 한 주 동안 이어졌다. 지하차도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가 물에 잠겨 빠져나오지 못한 분들부터, 그토록 꿈꿔왔던 선생님의 삶을 학교에서 스스로 마감한 교사, 대낮 도심 한가운데서 알지도 못한 사람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은 청년까지 모두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었다. 어느 죽음 하나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없었다.
경북 예천군 수해 현장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다 순직한 고(故) 채수근 상병의 죽음 역시 우리 모두를 참담하게 했다. 채 상병에게 보국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하는 것만으로 산 자들의 의무는 끝나지 않는다. 채 상병의 부모님이 편지로 전한 것처럼 "철저한 원인 규명을 통해 다시는 이같이 비통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반 규정과 수칙 등 근본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만 한다.
또 하나, 채 상병의 순국을 계기로 우리 군의 대민지원 활동이 이대로 괜찮은지도 뒤돌아봐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군인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 나라처럼 보인다. 국방 본연의 임무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군인들의 손을 빌려 해결하고 있다.
수해나 산불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그 복구 작업을 대부분 군인이 맡는다. 농번기에 농촌에 일손이 부족해도, 눈이 많이 와서 도로가 막혀도 군인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한다. 돼지콜레라가 발생했을 때는 대규모 살처분 현장에 군인이 동원돼 충격적인 장면에 트라우마를 겪기도 한다. 심지어 코로나19 당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벌어졌을 때는 마스크 공장에도 투입됐다.
이뿐 아니다. '군대는 대한민국 최대의 물가조절기구'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양파 파동으로 양파 값이 폭락하면 군대에 양파 반찬을 배급해 양파 값을 떠받치고, 조류독감으로 닭 소비가 줄어들면 한 달 내내 군인들에게 닭고기만 먹여 유효 수요를 만들어 낸다.
사병들의 복무 기간도 짧아지고 월급도 오르고, 저녁 시간에 휴대전화 사용도 가능해지는 등 '요즘 군대 좋아졌다'고 하지만 군인들의 대민지원하는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진흙으로 범벅이 된 수해 복구 현장에도 그냥 군복에 삽 한 자루 들고 투입되고, 꽁꽁 얼어붙은 눈길 제설작업에도 삽 한 자루 들고 나선다. 특수한 복장이나 장비를 지급받는 경우는 드물다. 식사는 흙바닥이나 길바닥에 앉아서 해결하기 일쑤다.
군인들의 불편이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그들을 공짜로 부릴 수 있는 노동력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사례는 많다. 지난해 봄 수도권의 한 지방단체는 '일손 빌려 드립니다'는 제목으로 모내기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 군인들을 배정하겠다는 홍보물을 SNS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또 강원도 한 지자체는 지난겨울 폭설 때 대민지원 나온 군인들에게 빌라 단지의 주차장 제설 작업을 시켰고, 수도권의 한 지자체에서는 지난해 수해 때 군인들을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청소 작업에 투입했다.
군인들의 대민지원은 '정부 부처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병력과 장비 등을 지원 요청받은 각급 부대의 장은 군 작전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한다'고 규정된 국방 재난관리 훈령에 따른 활동이다. 규정이 두루뭉술하니 대부분 일선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어디로든' 지원에 나선다. 당연하게도 지원 활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
군인들의 대민지원 활동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해서 긴급성을 요하는 분야로만 제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장 위급한 수해 복구 활동에 군인들을 동원했다면 위급성이 사라진 뒤에는 바로 부대에 복귀시키고, 청소나 쓰레기 처리 작업은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을 들여 처리해야 한다. 안전수칙도 의무화해야 하고 정당한 식사와 휴식도 보장돼야 한다. 군인들은 나라가 공짜로 부리는 막일꾼이 결코 아니다.
[김기철 콘텐츠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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