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디즈니제국의 두 번째 세기
유산은 얼마나 갈까
창조적 파괴는 가능할까
반세기 지난 한국 기업도
거듭나지 못하면 살 수 없다
아기 돼지는 덩치 큰 못된 늑대를 혼내준다. 늑대는 첫째와 둘째 돼지가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로 지은 집을 훅 날려 버린다. 하지만 셋째의 벽돌집에 침입했다가 보기 좋게 당하고 만다. 1933년 월트 디즈니가 내놓은 8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디서나 '크고 못된 늑대'가 반복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늑대는 대공황을 상징했다. 사람들은 지혜롭게 위기를 넘는 아기 돼지를 보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다. 디즈니는 일찍이 미국적 상상력의 아이콘이 됐다. 끼니 걱정을 하던 젊은이는 책상 옆을 돌아다니던 생쥐를 보고 '미키 마우스'를 창조했다. 혁신은 상상의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동작과 소리를 맞추고('증기선 윌리') 색깔을 입힌('꽃과 나무') 애니메이션은 놀라웠다. 디즈니는 꿈을 파는 상인이었다. 1955년 문을 연 디즈니랜드에서 사람들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디즈니가 할리우드에 둥지를 튼 건 꼭 100년 전이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제국이 된 이 기업은 석 달 후 두 번째 세기를 맞는다. 컬럼비아 픽처스는 디즈니와 같은 시기에 출범했다. 하지만 이 거인이 홀로 선 건 반세기에 불과했다. 컬럼비아의 폭군 해리 콘이 시간을 알려주는 리더였다면 자신의 사후에도 돌아갈 창조의 동력을 만든 월트 디즈니는 시간도 알려주고 시계도 만들어준 리더였다. 그는 196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극저온 상태로 안치돼 있다 언젠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깨어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만큼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21세기 들어 디즈니 일가는 회사에서 사라졌다. 월트의 조카가 자신이 영입한 마이클 아이스너와 불화를 빚다 쫓겨난 게 20년 전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디즈니는 경영권 승계의 불확실성에 싸여 있었다. 아이스너는 21년 동안 이 제국을 지배했다. 뒤를 이은 로버트 아이거는 15년 동안 권좌를 지켰다가 후임자가 갈피를 못 잡자 지난해 돌아왔다.
대선 출마를 고심했던 72세의 아이거는 전성기의 자신을 못 넘고 있다. 3600억달러에 달했던 디즈니의 시가총액은 1600억달러에도 못 미친다. 스트리밍 혁명을 주도한 넷플릭스, 출혈을 겁내지 않는 애플이나 아마존과 벌이는 대전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메타버스와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은 할리우드의 독점적 지위를 무너뜨릴 것이다. 마법 같던 비즈니스 모델은 무너졌다. 유산은 때로 짐이 된다. 파괴적 기술의 쓰나미가 덮칠 때 100년의 전통은 혁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아이거는 셋째 돼지처럼 갑작스러운 위협에 대비하려 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 오래된 집을 스스로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한다면 얼마나 어려울까.
우리나라에서 한 세기 동안 살아남은 기업은 손꼽을 정도다. 반세기를 버티면 장수 기업으로 꼽힌다. 5년 전 통계로는 대기업 중 6%인 300여 개사(중소기업은 1300여 개사)만 50년의 담금질을 견뎌냈다. 대부분 기업의 역사가 30년을 넘지 않는 만큼 디즈니의 고민은 먼 훗날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장부터 노화까지 압축적인 생애주기를 보이는 우리 기업들에는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업력은 짧아도 창업 세대는 이미 늙었을 수 있다. 아이거는 외부인인 아이스너가 디즈니를 재창업했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자신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디즈니의 두 번째 세기는 없으리라는 걸 안다.
기업은 스스로 재창조할 때만 존속한다. 빛나는 유산과 창조적 파괴의 갈등을 넘어야 하는 디즈니 제국의 딜레마는 놀라운 성장 신화를 간직한 한국 기업의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디즈니의 위기를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다. 아기 돼지의 우화는 언제나 유효하다. 경영권 다툼이든 파괴적 기술이든 늑대처럼 들이닥칠 위협은 많다.
[장경덕 작가·전 매일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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