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안내원 ‘괘씸하니 내보내라” 요구한 입주자대표··· 법원 “배상하라” 첫 판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아파트 안내원들의 행위가 ‘괘씸하다’며 관리업체에 이들의 직무 정지를 요구한 입주자대표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른바 ‘갑질 행위’이긴 하지만 이를 처벌하기는 어렵다는 게 그간 법조계의 중론이었다. 입주자대표는 안내원과 직접 고용계약을 체결한 원청이 아닌 특수관계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입주자대표가 안내원들을 대상으로 한 불이익한 인사 조치에 관여했다면 이에 대해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아파트의 실세인 입주자대표회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72단독 류일건 판사는 지난 21일 전직 아파트 안내원 A·B씨가 관리업체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C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B씨는 2011년부터 10년 가까이 서울 강남구의 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안내직원들로 일했다. 이들의 원래 업무는 로비 안내데스크에서 주민들을 상대하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것 등이었지만, 이밖에도 주민 민원 해결이나 배달물 수거, 정수기 점검 등 부가적인 일까지 맡아서 처리해야 했다. 근무시간엔 안내데스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하루에 한 시간 주어지는 휴게시간에 부가업무를 해야 했다. 하지만 법정 휴게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은 받지 못했다.
이에 A씨 등은 휴게시간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2020년 2월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요구는 입주자대표회의의 반대로 묵살됐다. A씨 등은 같은 해 8월 노동청에 임금체불 진정을 제기했다. 그러자 입주자대표회의의 본격적인 ‘갑질’이 시작됐다. 입대의는 관리업체에 “8월 말까지 두 사람을 대기발령 내거나 전환배치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관리실장은 실제로 이들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대기발령 조치를 했다. 결국 A씨 등은 그해 8월 말 사직서를 제출했다.
두 사람은 소속 관리업체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C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아파트 안내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입주자대표의 책임을 인정할 수 있는지였다. 재판부는 안내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관리업체는 원고들의 의사에 반해 전환배치 및 대기발령이라는 불이익 처우를 했고, C씨는 업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방법으로 관여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C씨와 관리업체가 불이익한 처우로 노동자의 기본적인 인격권을 침해했고, 이로 인해 A씨 등이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 경험칙상 명백하다”면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A씨 등이 청구한 미지급 임금 부분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A씨 등이 평일 근무 중 휴게시간 동안 부가업무를 수행했으므로 이를 ‘실근로시간’에 포함해야 한다고 봤다. 또 격주로 해왔던 토요일 근무도 연장근로에 해당한다면서 “관리업체는 A·B씨에게 각 1480만원과 1500만원을 퇴직금과 위자료로 지급하라”고 했다.
A씨 등을 대리해 온 윤지영 변호사(법무법인 공감)는 “관리업체와 계약을 맺는 경비원들은 입주자대표와는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입주자대표가 실권을 갖고 인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입주자대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선례를 만들고자 소송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윤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고용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을 법원에서 처음으로 확인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근로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배후 세력이 권한을 남용하는 상황이 줄어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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