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미치고 팔짝 뛸 사회
“펜이란 페니스의 은유인가?” 1979년 미국에서 발간된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백인 남성 중심의 문학과 글쓰기를 비판하고 19세기 영미권 주요 여성 작가들이 성취한 문학적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한 기념비적 페미니즘 문학 이론서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 등을 영미문학사에 새롭게 기입한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2009년 처음 번역됐고, (중고책 값이 20만원대로 치솟았으며) 2022년 재출간 1주 만에 초판 4천 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 영문학자 겸 작가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2021년 다시 선보인 <여전히 미쳐 있는>(류경희 옮김, 북하우스 펴냄)은 그 후속판이다. ‘미친 여자’가 다락방에서 나온 지 42년이나 지났음에도 “그녀는 타당한 이유로 여전히 미쳐 있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와 트럼프주의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백래시(반동) 속에 저자들은 항의행진을 할 수 있는 신체적 상태가 아니라 다시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책은 70년에 걸친 페미니즘 사상과 문학을 총망라한다.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싹이 움트고 실비아 플라스가 활동한 1950년대, 베티 프리단이 쓴 <여성성의 신화>가 나오고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벌어진 1960년대, 케이트 밀렛이 페미니즘의 이론적 철학 토대를 제시한 1970년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뒤얽힌 영향을 다뤘던 1980년대, 퀴어 이론이 등장한 1990년대를 거쳐 미국 페미니즘이 부활하고 후퇴를 거듭한 21세기까지.
영미권 페미니즘은 한국과 다르다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전작보다 심리적 거리가 가깝다. 세계화 영향이기도 하려니와 ‘미투’ 운동 전후 영미 페미니즘 작품과 이론이 한국에서도 적극 번역·출간되면서 동시대성을 획득한 까닭이다. 나아가 페미니스트 내부의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갈등을 드러내기에 전작보다 한층 더 정치적으로 읽힌다. 대륙 철학에 영향받은 주디스 버틀러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의 주장을 못마땅해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목소리에서도 페미니즘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반페미니스트 세력이 페미니즘 의제를 역이용하고, 백래시 세력에 여성들이 가담하며, 아직도 미소지니(여성혐오)는 기승을 부리지만 연대와 학습의 즐거움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죽음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호두 펴냄, 3만2천원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 장켈레비치가 펼쳐낸 죽음에 관한 사유. 유대계인 저자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죽음은 제3자가 겪은 충격적 사건이지만 실제 죽음은 모두가 생각해야 할 삶의 의제이기도 하다. 장켈레비치는 ‘내 죽음’에 관한 생각을 중시하며 죽음의 성격을 드러내려 한다.
인구 위기
알바 뮈르달·군나르 뮈르달 지음, 홍재웅·최정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2만4천원
1934년 출간된 인구문제의 고전. 스웨덴어 원전을 국내 첫 번역 출간했다. 사회학자 알바 뮈르달과 정치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이 당시 스웨덴의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분석하고, 분배·사회·생산 정책의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자녀 양육비 절감을 위해 사회가 노력해야 하고 돌봄의 사회적 시스템으로 여성의 삶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카치가 있어 즐거운 세상
조승원 지음, 싱긋 펴냄, 3만9천원
위스키 인기를 타고 술꾼 사이에서 먼저 입소문이 난 책. <버번 위스키의 모든 것>을 쓴 조승원 기자가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를 소개한다. 스코틀랜드 5개 지역 증류소 가운데 스페이사이드와 아일라 증류소 이야기를 실었다. 스페이사이드는 130개 스카치 증류소 중 절반이 몰려 있는 ‘스카치의 심장’이고 강력한 피트향으로 유명한 아일라는 ‘위스키 성지’다.
MBC의 흑역사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1만9천원
1987년 6월항쟁으로 ‘방송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공영방송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저자는 “똑같은 싸움을 반복하면서 국력을 탕진하는 걸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숙명으로 보는 체념의 지혜를 터득한 지 오래”라면서도, MBC의 과한 당파성을 묵인하지 않았다. 2022년 말부터 월간 <신동아>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했다.
2030 삼성전자 시나리오
김용원 지음, 세이코리아 펴냄, 2만3천원
글로벌 경쟁 속에서 삼성전자의 앞날을 냉정하게 가늠해보는 경제서. 한국 경제의 ‘대표선수’로 국민적 관심 속에 성장한 삼성전자는 코로나19 대유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 놓이게 되었다. TSMC, 애플 그리고 국내 다른 기업 3세대들과의 리더십 경쟁을 분석해 이재용 회장의 과제까지 꼼꼼하게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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