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戰 와중에 폴란드·러시아 '역사 전쟁' 또 불거져

김태훈 2023. 7. 2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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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폴란드 땅 일부는 스탈린 선물"
`은혜도 모른다` 지적에 발끈한 폴란드
"스탈린은 전범… 거짓으로 역사 왜곡"

“스탈린이 건넨 선물을 고맙게 여겨라.”(러시아)

“거짓말로 역사를 왜곡하려 하지 마라.”(폴란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A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가뜩이나 사이가 나빠진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때아닌 ‘역사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폴란드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소련(현 러시아)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배려 덕분이란 러시아의 주장이 계기가 됐다. 발끈한 폴란드는 “허구적인 주장”이라며 러시아를 겨냥해 2차대전 때 스탈린 그리고 소련의 행적부터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

발단은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주재한 정례 국가안보회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푸틴은 폴란드가 인접국 벨라루스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벨라루스에 대한 어떤 공격도 러시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후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우방을 자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규모의 무기를 제공한 것은 물론 엄청난 숫자의 전쟁 피난민들도 자국에 수용하는 중이다. 반면 벨라루스는 오랜 맹방인 러시아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자국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빌려주기도 했다.

‘벨라루스를 건들지 말라’는 경고와 더불어 푸틴은 폴란드를 ‘배은망덕한 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폴란드)은 자신들의 서부 영토가 스탈린의 선물임을 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폴란드 정부를 격분시켰다. 파벨 야블론스키 폴란드 외교차관은 이튿날인 22일 세르게이 안드레예프 바르샤바 주재 러시아 대사를 초치했다. 이후 기자들과 만난 야블론스키 차관은 푸틴의 발언을 ‘거짓말’로 깎아내리며 폴란드는 벨라루스를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강조했다. 이어 “(과거 스탈린에 비견되는) 푸틴이라는 현대의 전범이 옛 전범 스탈린의 무죄를 주장하려는 시도”라고 푸틴을 맹비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소련(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는 모습. 오른쪽 두 번째 서 있는 인물이 당시 소련 지도자이던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불가침 조약 체결을 계기로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폴란드 등 동유럽 땅을 소련과 독일이 나눠 갖자’는 비밀 약속을 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두 나라의 이같은 인식차는 왜 생겨난 걸까. 2차대전은 1939년 9월1일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침략하며 시작했다. 그런데 폴란드가 미처 몰랐던 적(敵)이 하나 더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 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일명 ‘나치·소비에트 협정’)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딸린 비밀 항목에는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등 동유럽을 사이좋게 분할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폴란드가 서쪽에서 독일군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1939년 9월17일 이번에는 동쪽에서 소련군이 쳐들어왔다. 얼마 뒤 폴란드는 패망했고 그 국토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독일과 소련이 나눠가졌다.

이처럼 2차대전 초반 소련은 사실상 나치 독일의 동맹이자 명백한 ‘가해자’였다. 그런데 이후 스탈린과 사이가 틀어진 히틀러가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침공을 명령하며 소련은 갑자기 ‘피해자’로 둔갑했다. 미국, 영국과 3대 연합국을 형성하고 나치 독일을 단죄하는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겪었다. 이런 희생에 힘입어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3대 연합국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할 때 소련의 발언권은 엄청나게 커졌다. 미국과 영국은 2차대전 초반 소련이 폴란드에서 빼앗은 땅은 그대로 소련 영토에 귀속된다는 점에 동의했다. 대신 3대 연합국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독일 땅 일부를 떼어내 폴란드에 보상으로 제공키로 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독일와 폴란드 간 국경선이 확정됐다.
1945년 2월 2차대전 전후 처리 문제 논의를 위해 열린 얄타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현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은 2차대전 초반 전범이자 가해자였으나 후반에는 연합국 3대 거두의 한 명이자 유럽의 해방자로 둔갑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결국 ‘폴란드 서쪽 땅은 스탈린의 선물’이라는 푸틴의 언급은 억지에 가깝다. 독일 영토 일부를 폴란드에 넘기도록 한 조치는 스탈린 한 사람이 내린 게 아니고 미국·영국·소련 3대 연합국이 합의한 사안이다. 또 폴란드는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대신 동쪽 땅 일부를 소련한테 빼앗겼다.

요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과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는 ‘2차대전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소련이 연합군의 일원이 되기 전 나치 독일과 비밀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분할하는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을 미래 세대한테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는 스탈린은 유럽의 해방자가 아니고 히틀러와 동급의 전범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한다. 소련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러가며 나치 독일과 싸우지 않았다면 유럽 국가들은 나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란 논리를 편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2차대전을 연합국 승리로 이끈 위대한 영웅이라고 치켜세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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