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많았구나, 라인 막아내며 기형 돼버린 내 손”
일일 포장 노동자 혜선씨
“10여년 동안 고생 많았구나/ 어느새 시간이 흘러/ 50줄에 접어들어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기형이 되어버린 손/ 세월의 흔적이겠지/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자/ 그동안 고생했다.”
종이에 손을 본떠 그리고, 당신 손에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달라 했다. 뜬금없었을 텐데, 혜선(가명)씨는 선뜻 볼펜을 받아 쥐었다. 기형? 그냥 봐서는 모르겠는데, 만져보니 손가락이 울퉁불퉁.
“휘었어요. 물건 담은 박스를 포장한다고 박스 칼(박스테이프 커터기)을 잡잖아요. 손가락에 변형이 와요. 네 손가락에 2장씩 바코드스티커를 8장 붙여놓고 떼 붙이는데 그 영향도 있죠. 팔꿈치에도 엘보(주관절 외상과염)가 많이 왔어요. 물건을 팰릿에 쌓는데, 두 사람이 같이 해도 반복적인 일을 계속하다 보면 힘이 들어요. 서서 일하니까 무릎도 아팠죠. 근육이완제 먹고, 진통제 먹고, 파스 붙이고 일하는 거죠. 그럼 좀 괜찮아져요.”
회사, 당연한 실업급여 “받게 해줄게”
그러께 말 회사가 폐업할 때까지, 혜선씨는 12년 동안 밀폐용기 포장 회사에서 일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 1시간과 오후 한차례 쉬는 20분을 빼고는 하루 내내 서서 일했다. 직원 30~40명 중 고정해서 일하는 정규직은 그이를 포함해 10여명. 나머지는 수시로 뽑는 알바 계약직이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어요. 길면 1~2년, 짧으면 1~2주, 보통은 몇달. 힘드니까 못 버티고 나가요. 예를 들면, 반찬통 뚜껑을 닫아야 하는데 새 제품이라 잘 안 맞아요. 손에 물집이 잡히고 까지죠. 그것만 계속 닫는 게 아니라, 제품 종류가 숱하잖아요. 여름에는 물병 위주로 하는데, 전단도 넣고 바코드도 붙이고 스티커도 붙이고 비닐에 하나씩 넣어 테이프로 마무리해요. 모든 제품이 라인을 죽 타요. 유리 제품은 좀 느리게 타고, 플라스틱은 빠르게 타는데, 플라스틱 물병은 정신없이 내려와요.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서 힘들어요. 나도 알바로 시작해 2주 만에 그만두고 싶었는데, 한달을 채워 월급을 받으니까 아! 쏠쏠한 거예요. 집에서 부업 하던 거랑 달랐죠. ‘이 돈으로 우리 세 아이, 옷도 사주고 뭐도 사주고 할 수 있겠구나.’ 한달, 한달 하다 12년을 온 거죠.”
집 가까이 있던 회사가 두번 이전할 때도 혜선씨는 함께 움직였다. “한번 들어간 데를 계속” 다녔다. 생업이기도 했지만, 책임감도 있었다.
“4~5년쯤 지나 반장으로 한 라인을 맡아서 책임지고 했어요. 그래서 이전할 때도 빠질 수가 없었어요. 수출을 많이 하던 회사였거든요. 필리핀, 베트남, 스페인, 미국, 남미, 여러 나라로 나갔죠.”
책임은 맡겼지만, 회사는 그에 맞춰 대우하진 않았다. 수출역군이었지만, 최저임금이었고 안전수당 조금에, 명절 떡값 10만원이 전부였다. 현장 라인에 섰던 여성들에겐 상여금이 없었다.
“엄마들은 다 그냥 회사 다니는 거에 감사했던 것 같아요, 정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요. 자부심은 모르겠고, 여기를 다녀야만 한다 생각했죠. 힘들어도 일이 몸에 익숙해지니까, 아침에 눈뜨면 ‘아, 오늘도 나가서 일해야지’ 그러고 나갔던 것 같아요. 이거저거 따지고 요구했다면, 사장이 가만히 있진 않았겠죠? 우리 자리도 다 알바로 채우지 않았을까요?”
코로나19 시국, 수출에 차질이 생겨 사정이 어려워졌다며 회사가 문을 닫는다고 했다. 사장은 그동안 회사를 키운 직원의 고용을 보장하려 애쓰지 않았다. “위로금 몇 푼 주고”는 당연한 실업급여를 “받게끔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퇴직금도 아쉬웠다. 회사는 그간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직원들의 퇴직금을 여러 차례 중간정산했다. 최저임금이 더 열악할 때였다.
“마지막 출근 날, 집에 돌아오는데 ‘아, 이제 어쩌나? 내일부터 어쩌지?’ 그런 느낌이었어요.”
날마다 문자로 받는 계약서
혜선씨는 실업급여(구직급여) 기간에 일자리를 알아봤다. 쉰 중반, 고용시장에선 나이가 장벽이었다. 여성인력센터와 고용센터에도 구직을 신청했는데, 연락 오는 곳은 식당 아니면 어린이집 청소로 단시간 일자리였다. 옛 직장 동료들도 청소나 반찬 소분 포장 일을 한댔다. 혜선씨는 나중을 생각해 요양보호사와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땄다.
“일자리를 찾아보면 대부분 알바직이에요. 구직 사이트에서, 여기 갈 만하네 싶으면 45살 미만이에요. 밀폐용기 쪽도 알아봤는데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가 아니더라고요. 지난해 가을부터 제조업 포장부서에서 일하는데, 일이 있을 때만 불러서 한달에 길면 2~3주 일해요.”
이곳 포장부서는 모두 일용직이라 날마다 근로계약서를 받는다. 아침에 일을 시작해 출근이 확정되면, 파견업체가 문자로 근로계약서를 보낸다. 임금은 일당 주급제로 파견업체가 그다음 주중에 입금한다. 8시간 일하면 최저시급이고, 2시간 연장할 때 얼마를 더 얹어 준다고 한다. 주휴수당은 없다.
“다른 데서 일하다가도 포장 일이 연락 오면 그만두고 가요. 통근 거리가 가깝고 일이 몸에 익숙해져서요. 주휴수당 그런 걸 따질 수가 없어요. 일이 없으니까 다들 암묵적으로 그냥 다녀요. 내가 안 나가면 다른 사람이 대타로 들어오잖아요? 그럼 내 자리를 뺏겨요. 그 자리를 잃으면 난 또 순번을 기다려야 해요.”
회사 관리자는 업무를 관리·감독하다 누군가 마음에 안 들면 파견업체에 연락한다. 다음날 바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다. ‘해고’다.
“잘리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자른 게 아니라, 안 불러주는 게 되죠. 지난해에는 30~40명 됐는데, 지금은 10명에서 15명밖에 안 불러요.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데 내가 계속 다닌다는 말을 못 해요.”
포장 일이 없을 때마다, 혜선씨는 진단키트 공장에서 두달, 화장품 회사에서 일주일씩 일했다. 전자 회사에서 칩을 끼우고, 빨래방에서 미용실과 헬스장용 수건과 헬스복을 개었다.
“어떤 곳은 텃세로 오래 못 해요. 자기 자리가 잘릴까 봐, 새로 온 사람을 치죠. 내 생각에 요령껏 이렇게 하면 잘될 것 같은데 가르쳐준 대로 안 한다고 뭐라 해요. 체력이 안 따라줘서 내가 못 버티고 나오기도 해요. 그전에는 약 먹으면 거뜬했는데, 안 듣더라고요. 그래서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지금 심정이 그래요. 12년 일했던 회사 다닐 때도 아무리 힘들어도 울지는 않았어요. 막내까지 애가 셋이잖아요. 악착같이 살아야 해서 더 그랬을 거예요. 용감해야 했으니까요. 이제 막내 대학만 남았으니까 계속 일해야지요.”
혜선씨에게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줄 친 동그라미 안에 ‘여성노동자’를 제목 삼아 한 어절씩 막 떠오르는 대로 마음껏 써달라고. 쓱쓱, 혜선씨가 머뭇거리지 않고 써내려갔다.
“여성으로서 사회에 나가서/ 적응해야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진 삶이/ 있기에 버텨 본다/ 내일을 위해.”
르포 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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