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보다 선거구제 개혁…‘국민통합’ 노무현의 꿈은 이루어질까
노무현 대통령은 지독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동시에 지독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대통령 임기 말이 다가오자 국정 현안과 정치철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2007년 9월6일 아펙(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전세기 안에서 김경수 연설기획비서관에게 메모를 건네며 기록용으로 남겨두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대연정과 관련하여
-대통령의 생각은 너무 앞서가고 있었다.
-이상은 높은 곳에 있었고 정치 현실은 여소야대 일방통행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여소야대 당정분리 대통령, 기름 떨어진 자동차.
*정치 중립 대통령, 거세한 정치인.
2007년 11월 초에는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권력투쟁이므로 정치인은 항상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공격하는 나 자신도 공격받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견뎌내기에는 어려운 일이라 삶이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쉽지만, 발을 빼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시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민주주의가 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많이 깨쳤고 누구도 할 수 없는 많은 경험을 했다. 정치와 역사에 대해 많은 깨침이 있었는데 시민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뭔지, 우리 역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대화하면서 정치를 논한다면 좋겠다. (중략) 그 또한 기회가 없으면 조용한 개인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퇴임을 앞둔 대통령으로서 짙은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 담긴 소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한나라당, 검찰, 언론 등 대한민국의 이른바 기득권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을 ‘조용한 개인’으로도 그냥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이기면 천국, 지면 지옥
얼마 전 김경수 전 경남지사와 윤석열 대통령 이야기를 하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인과 대통령으로서 한 일은 모두 다 ‘국민통합’이라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필사’였던 윤태영 전 부속실장이 2015년에 쓴 <바보, 산을 옮기다>라는 책을 소개해주었습니다.
“그의 정치는 ‘국민통합’에서 시작되었다. 마지막까지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목표도 ‘국민통합’이었다. 이렇듯, ‘국민통합’은 그의 정치역정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정치의 지역구도 청산을 위해 걸어온 자신의 역정을 밀도 있게 정리해줄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했다.”
그랬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시장에 출마해 낙선했습니다. 1996년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종로에 출마해 낙선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도와 정권교체에 성공했습니다. 1998년 재·보선 때 종로에 출마해 당선했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해 낙선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국민통합을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취임 직후 국회 시정연설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17대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에 내각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했습니다. 2005년 대연정 제안도 국민통합이 목표였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소신을 꺾지 않았습니다. 사후 회고록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이루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인재와 자원의 독점이 풀리고 증오를 선동하지 않고도 정치를 할 수 있다.”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떠난 지 14년이 지났습니다. 노무현의 꿈이었던 국민통합이 얼마나 이뤄졌을까요?
통합은커녕 정치 양극화가 훨씬 더 심해졌습니다. 분열과 증오의 정치는 우리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면 천국이 오고 저들이 이기면 지옥이 온다’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이 우리를 끊임없이 세뇌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진영의 시민’ 아닌 ‘공화의 시민’으로”
7월17일 75주년 제헌절 경축사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통합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국민통합을 위한 선거법 개정과 개헌을 ‘간절히’ 촉구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전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대립과 갈등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특히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세운 지도자들은 일제 치하와 해방정국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실낱같은 국민통합의 길을 열어내기 위해 절치부심했습니다. 정파의 이해를 넘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내는 일을 국가 존망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제헌의 그날처럼 오늘의 시대정신 역시 국민통합입니다. 당면한 위기를 이겨낼 힘은 오직 국민의 단결된 마음에서 나옵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민통합을 이뤄낼 수 있도록 분권과 협치를 제도화합시다. 우리 국민이 ‘진영의 시민’이 아니라 ‘공화의 시민’이 되는 길을 열어냅시다.”
제헌절 바로 다음날 국회도서관에서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한국행정연구원이 함께 펴낸 <정치 양극화 시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방안> 출판기념회가 열렸습니다. 정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개혁 방안을 담은 내용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두 기관과 한국정당학회, 국회미래연구원, 이명수·최형두·김종민·김영배·이은주·조정훈 의원 등의 집중 연구와 집담회 등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김 의장, 윤재옥(국민의힘)·박광온(더불어민주당)·배진교(정의당) 원내대표도 참석해 축사했습니다. 김 의장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남은 임기 동안 분권과 협치를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을 간절히 추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원내대표들도 정치 복원을 위한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일
이번 기획을 총괄한 박준 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이 책 에필로그에 정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개혁 방안을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핵심에 해당하는 일부 내용만 간추려서 소개하겠습니다.
“양극화된 정치에서는 공동선의 증진이 아니라 상대 정치세력을 쓰러뜨리는 것이 정치의 목표가 된다. 그래서 자기 진영의 인물이나 정책에 아무리 흠결이 있어도 이를 변호하고, 상대 진영이 집권해서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이유를 붙여가며 비방하고 공격하는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양극화된 정치에서는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정신이 지켜지기 어렵다.”
“갈등 해결이 난항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정치인들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대의 정치를 통합의 정치로 바꿀 만한 제도적 유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정착된 정치적 경쟁의 규칙이 철저하게 승자독식의 체제였기 때문이다.”
“다당제 연합정치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먼저 구축되어야 협치가 가능해지고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도 발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분권형 대통령제 및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등이 필요하다.”
“소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혼합, 국회의원 정수 증원을 통한 비례대표 의석 비율 대폭 확대, 인구 감소 지역의 대표성 강화 등이 필요하다.”
“공천제도의 분권화, 정당의 정책 형성 과정에 당원들의 참여 적극 유도, 지구당 부활, 지역 정당 설립 허용 등이 필요하다.”
어떻습니까? 저는 이번 기획의 결과물을 보고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민통합에 정치 인생을 걸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문제의식과 실천 의지를 많은 정치인과 학자들이 굳건히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의 꿈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정치를 욕합니다. 정치 때문에 나라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두차례 시민혁명으로 독재를 몰아냈습니다. 1987년 이후 헌정 질서가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습니다.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혼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정치의 저력입니다.
2002년 월드컵 구호는 ‘꿈은 이루어진다’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월드컵 열기가 식지 않은 가운데 치러진 2002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저는 ‘국민통합’이라는 노무현의 꿈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언젠가 ‘케이팝’이나 ‘케이방역’처럼 국제사회가 ‘케이정치’를 높이 평가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권력보다 선거구제 개혁…‘국민통합’ 노무현의 꿈은 이루어질까
- 국토 64%가 산…‘산사태 일상화’에도 부동산값 하락 걱정할텐가
- “9월4일 연가 내자”…숨진 교사 49재 때 ‘연대 파업’ 움직임
- “고생 많았구나, 라인 막아내며 기형 돼버린 내 손”
- ‘수상한 소포’ 1600여건 신고…“중국서 발송, 대만 거쳐 한국에”
- 한반도 서쪽 호우특보…비 그친 곳은 바로 열대야
- 프랑스 ‘빈곤의 섬’ 소요가 한국에 던지는 ‘이민자 공존’ 숙제
- 실업급여로 샤넬, 안 돼? [The 5]
- 오로라 부르는 ‘태양 에너지’ 폭발 순간…경이로운 천문 사진
- “생존권 보장해달라” 거리 나선 교사들, 추모곡 부르며 눈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