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1970년대 들어 서울의 범위가 넓어지고 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한강에도 우후죽순처럼 교량이 건설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만 무려 8개(마포대교, 잠실대교, 영동대교, 천호대교, 잠수교, 행주대교, 성수대교, 잠실철교)의 다리가 준공됩니다. 이 시기부터 지금까지 놓인 수많은 다리들 중 잠수교·반포대교와 성수대교를 짚으며 사-연 한강 다리 편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국내 최초 복층 교량, 잠수교와 반포대교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연결하는 잠수교와 반포대교는 위아래로 나란히 놓인 2층 교량입니다. 두 다리 중 어느 것이 먼저 건설되었을까요? 잠수교는 1975년 9월에 착공해 이듬해 7월 15일 완공하였고, 반포대교는 1980년 1월에 착공해 1982년 6월 25일 완공되었습니다. 잠수교가 반포대교보다 6년여 정도 빨리 건설된 셈입니다.
잠수교는 이름 그대로 홍수가 났을 때 물에 잠기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마철 물에 잠기더라도 유실되지 않게 특수공법으로 지어졌습니다. 잠수교의 상부 노면은 한강 수면보다 약 2m 가량 높아 매년 평균 10여 일간 물속에 잠깁니다. 개통 후 첫 ‘잠수’는 완공 한 달 뒤였던 1976년 8월 집중호우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잠수교는 물에 잠길 정도로 수면에 가깝게 건설되었을까요. 답은 군사적 목적 때문입니다. 전시상황에서 다른 교량들이 파괴되었을 때, 전차나 장갑차 같은 기갑부대가 빠르게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그 높이를 낮춘 것입니다. 또한 다리 가운데 교각 간격을 15m로 촘촘하게 설계해 교량의 상판이 무너진 위급상황에서도 신속한 복구가 가능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잠수교는 초기에 ‘안보교’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영동지구를 개발하며 고속버스터미널을 반포로 신축 이전하였고, 도심과 남산 3호터널, 반포를 잇는 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또한 제1한강교(한강대교)와 제3한강교(한남대교)로 몰리는 차량을 분산해야 하는 숙제도 있었습니다. 잠수교가 놓였지만 차선이 좁고 홍수로 인한 교량 통제가 잦은 이 다리로는 교통량을 소화하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1982년 잠수교 상부에 왕복 6차로의 반포대교를 건설합니다.
반포대교에는 2008년 9월 ‘무지개분수’라는 이름의 교량분수가 설치됩니다. 길이 1.2km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장의 교량분수는 여름밤 화려한 조명, 음악과 함께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한강공원을 찾은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분수에 사용되는 물은 아래 한강에서 수중펌프를 이용해 퍼 올리고, 1분에 190톤의 물줄기를 다시 한강으로 뿜어냅니다.
한강 다리 중 가장 길이가 짧고 반포대교를 지붕으로 그늘을 갖고 있는 장점이 있는 잠수교는 보행전용교로 다시 태어날 예정입니다. 얼마 전 서울시는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의 핵심 전략 중 하나로 잠수교를 보행전용교로 바꾸고, 시민 여가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기획 디자인 공모를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군사적 용도로 설계된 다리가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어떻게 다시 탈바꿈할지 기대가 됩니다.
성수대교, 참사의 기억
1979년 한강을 가로지르는 열한 번째 교량으로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완공됩니다. 성수대교는 국내 최초로 ‘게르버 트러스’ 공법으로 설계되었는데요, 이 공법은 미리 콘크리트 교각을 놓고, 그 사이에 삼각형 형태로 엮은 철강 트러스를 올리는 방식입니다. 교각 사이의 간격을 넓게 설계할 수 있어 확 트인 미관을 보이는 것이 게르버 트러스 공법으로 건설된 교량의 특징입니다.
1994년 10월 21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아침이었습니다. 오전 7시반경, 성수대교 10번 11번 교각 사이 48m가 무너져 내리며 다리 위에 있던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그대로 추락했습니다. 출근하던 직장인들과 등교하던 무학여중고 학생들을 비롯한 32명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참사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 한복판의 대교가 폭삭 무너진 이 사건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고, 올림픽 같은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큰 상처와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렇다면 지은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다리가 붕괴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사건의 전조는 분명 있었습니다. 사고 당일 새벽부터 성수대교의 상판 이음매에 균열이 있다는 신고가 여럿 접수되었습니다. 서울시는 벌어진 틈새를 덮기 위해 대형 철판을 임시방편으로 깔아두었고, 그 이외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발생 한 시간 전에도 한 운전자가 균열부를 지나다 큰 충격을 느끼고 신고 전화를 했지만 교통 통제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리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은 시공사였던 동아건설의 부실공사였습니다. 앞서 말한 ‘게르버 트러스’ 공법은 철골의 이음새가 딱 맞지 않으면 붕괴의 위험이 있는 공법이었습니다. 이음새 용접은 엉망이었고, 완공 후에도 접합부위를 유지·보수해야 했지만 이를 등한시했습니다. 사고 이후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트러스의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구멍도 제멋대로 뚫려 있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통량의 폭증과 그에 따른 교량의 조기 노후화를 예측하지 못한 서울시의 책임도 있습니다. 성수대교 하루 통행량을 8만대 정도로 예측했지만, 실제 통행량은 그 두 배가 넘는 16만대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사고 전년인 1993년에는 동부간선도로 성수-상계구간이 개통하며 성수대교의 교통량이 폭증했습니다. 성수대교 북단에는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다리의 통과하중 기준을 넘는 레미콘 트럭들이 수시로 오갔지만 별다른 제재는 없었습니다.
사고 직후 서울시는 3개월 내로 성수대교의 붕괴부분을 재시공하여 개통할 것을 발표하지만,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기로 결정합니다. 1995년 4월 복구공사에 돌입한 성수대교는 1997년 8월 완공되어 통행이 재개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강 모든 다리의 안전성 전수조사에 돌입합니다. 그 결과 당산철교에 중대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열차를 서행하거나 교량을 대대적으로 보수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자, 1997년 지하철 2호선 합정-당산 구간 운행을 아예 멈추고 철교를 재시공합니다. 노후화가 심각했던 광진교, 양화대교, 한남대교도 보수작업에 들어갑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와우아파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부실 관행들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최근 불거지는 신축 아파트의 철근 빼돌리기나 부실시공 사건들을 보면 성수대교 참사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강의 커다란 다리가 무너진 지 30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사이 다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대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붕괴된 성수대교의 컬러 사진들을 넘기며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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