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의 스테이블 코인 발언…코인 투자자, 쨍하고 해뜨나[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브레이너드 방침 확정되면 가상자산에 또 충격 가해질 것
테라·루나 사건 등으로 난타당했던 코인 투자자들이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비트코인에 대해 스테이블 코인, 즉 화폐 기능을 인정한 말 한마디에 ‘쨍하고 해 뜰 날이 다시 올 것인지’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성급한 코인 투자자들을 위해 과연 비트코인이 파월 의장의 발언대로 스테이블 코인이 될 수 있는지 베네수엘라의 사례를 통해 알아본다.
‘페트로’로 짚어보는 가상자산
5년 전 정부 주도의 첫 가상자산이 나와 지금처럼 코인 투자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 적이 있었다.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라 정부가 발행했던 ‘페트로(petro)’다. 총 물량은 1억 개로, 1페트로의 가치는 베네수엘라산 원유 1배럴 가격에 연동해 60달러다. 계획했던 물량이 다 팔렸다면 베네수엘라 정부는 6조5000억원에 달하는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목적은 디폴트 타개다. 고유가를 바탕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상 원조’라는 비현실적인 ‘차베스‧마두라 구상’이 국제 유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경제를 파탄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법정 화폐인 볼리비아화가 휴지가 된 여건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 디폴트 타개책은 백약이 무효가 될 수밖에 없었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졌다. 특히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차베스에 이어 마두라 시대에도 하이퍼 인플레이션 국면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경제고통지수(실업률+소비자 물가상승률)가 더는 견디지 못할 만큼 치솟자 조국을 등지고 콜롬비아·칠레·브라질 등 인접국으로 떠난 국민이 30%가 넘는다.
성공 여부를 떠나 페트로는 화폐 발행 역사상 큰 의미가 있다. 정부 주도의 첫 가상자산이라는 점이다. 페트로 발행 계획 물량 1억 개 가운데 최소한 50%만 소진된다면 법정화와 화폐 개혁 문제를 비롯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가상자산에 대한 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금본위제, 즉 브레튼우즈 체제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하기까지 달러 가치는 금값에 연동(1온스=35달러)해 유지됐다. 페트로의 가치는 베네수엘라가 세계 최대 매장량을 보유한 원유(1배럴=60달러)와 연계해 ‘원유 본위제’라는 용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 원자재 세계 단일 통화 구상인 테라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때 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던 맥주 브랜드인 테라는 라틴어로 ‘지구’라는 의미로, 유로화의 창시자인 버나드 리테어 전 벨기에 루뱅대 교수가 주장한 세계 단일 통화 구상이다. 테라의 가치를 원자재 가격과 연동한다는 점에서 페트로와 비슷하다.
페트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후손 대대로 물려줘야 할 부존자원인 원유를 현세대, 특히 차베스와 마두라 전·현직 대통령이 저지른 디폴트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은 ‘희대의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베네수엘라 내부 지식인뿐만 아니라 중남미 우파와 국제 금융 시장에서도 대부분이 이 시각이었다.
반면 ‘기발한 혁신’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화폐 발행을 늘려 전쟁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는 인플레이션 대책과 달리 페트로 발행은 고정돼 있어 베네수엘라 경제의 최대 난제인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효과적인 대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로 니콜라스 마두라 대통령을 비롯한 베네수엘라 좌파 세력들의 시각이다.
디폴트 타개책으로 페트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정부 주도의 첫 가상자산인 만큼 베네수엘라 국가 신인도가 선결 요건이다. 3대 국제 신용 평가사가 베네수엘라의 국가 신용 등급을 정크 단계로 강등시킨 지는 오래됐다. 가상자산 투자를 바라보는 분위기도 부정적이다.
비트코인, 준화폐 일종인 대안 화폐로 분류
페트로 가치를 원유에 연계한 만큼 유가는 ‘변동성(volatility)’이 적어야 하고 ‘수준(level)’은 일정 수준 이상이 유지돼야 한다. 금융 위기 이후 각종 가격 변수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유독 유가의 변동성이 가장 크다. 대체 에너지 개발이 많이 된 수급 여건에서 유가가 페트로 출발선인 60달러 이상을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미국의 방침도 중요하다. 페트로 성공 여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은 베네수엘라와의 모든 직간접 금융 거래를 금지하고 있다. 줄타기 외교에 능숙한 마두라 대통령이 기대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참여도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하면 쉽지 않아 보인다. ‘희대의 사기극이냐’, ‘기발한 발상이냐’ 중 결국은 전자로 끝났다.
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파월 의장의 스테이블 코인 발언은 Fed의 공식적인 방침은 아니다. 디지털 달러화 연구와 도입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온 책임자는 레이얼 브레이너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브레이너드 위원장의 방침은 비트코인에 화폐 기능을 부여하기보다 새롭게 디지털 법정 통화(CBDC)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방침 중 어느 쪽으로 가느냐는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자산업계와 투자자의 명암이 갈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파월 의장의 견해대로 수정되면 비트코인과 가상자산 산업은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자 사이에서는 비트코인 가격이 캐시 우드 아크인베스트먼트매니지먼트 최고경영자(CEO)가 내다본 51만 달러까지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성급한 기대까지 나오고 있다. 반대로 브레이너드 위원장의 방침이 확정되면 비트코인과 가상자산은 산업적인 면에서 유틸리티 기능은 남아 있겠지만 투자자들은 또 한 차례 충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통화 정책 면에서도 차이가 크다. 파월 의장의 방침대로 비트코인에 화폐 기능을 인정하면 발권력과 이에 따른 시뇨리지(화폐 발행 차익)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두 문제는 중앙은행에 집중시킬수록 바람직하다. 파월 현 의장이 어떻게 법화가 아닌 비트코인에 화폐 기능을 인정할 수 있느냐고 비판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화 지표를 어디까지 안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따른다. 화폐 기능이 부여된 비트코인은 준화폐의 일종인 대안 화폐로 분류된다. 현재 통화 지표인 M1, M2, M3와 유동성 지표인 L4, L5, L6에 이어 비트코인의 첫 글자를 딴 B1, B2, B3까지 확대되면 통화 지표는 복잡해지고 혼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경기 예측력도 떨어지게 된다. 화폐로서 비트코인이 사용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종전 경제 지표와의 인과성이 떨어지고 정형화된 사실(예를 들어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간 역비례 관계)도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시계열 자료상 불연속성을 채우기 위해 가변수(dummy)를 많이 사용하면 모델과 기술적 분석에서 나온 예측치를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 등 신뢰성 문제에도 봉착한다.
정확한 경기 예측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선제성(preemptive)을 생명으로 하는 통화 정책의 유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초불확실성 시대를 맞아 케인스언의 통화 정책 전달 경로(기준금리 변경과 유동성 조절→시장 금리 변화→총수요 반응→실물 경제 영향)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여건에서는 더 그렇다.
유사 금융 행위도 판치게 된다. 비트코인에 화폐 기능 부여로 각종 가상자산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다면 ‘새로움과 복잡성’에 따른 위험 증대로 금융 감독이 옴니버스 방식으로 접근하지 못하면 국민의 화폐 생활에 일대 혼란이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화폐 개혁 논의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보다 앞서 CBDC를 도입한 대부분 국가는 비트코인을 비롯한 각종 가상자산에 화폐 기능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조기 정착시키기 위해 비트코인과 각종 가상자산 거래를 불법으로 배척하고 있다. 디지털 달러화 도입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미국도 지금까지는 중국과 비슷하다.
한국은 2017년 비트코인 투기 열풍, 2021년 이후 테라 사태 등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국격이 떨어지고 사회적 병리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투자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봐 왔다. 파월 의장의 스테이블 코인 발언을 계기로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책 당국의 선제적 대응과 코인 투자자들의 신중한 자세가 요구되는 때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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