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신임 CEO가 1년만에 쫓겨난 내막[PADO]

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2023. 7. 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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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최근 미국과 영국의 대표적인 방송사들이 모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BBC는 계속되는 스캔들로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얻어맞고 있으며 CNN은 신임 CEO 크리스 릭트가 취임 1년만에 물러나는 파국을 맞았죠(현재도 대행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 발췌 소개하는 애틀랜틱의 6월 2일자 기사는 흔들리고 있던 릭트의 리더십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기사가 발행된 지 5일만에 CNN의 모기업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릭트의 사임을 발표했죠. 기자 팀 앨버타는 원고지 250매, 영어 원문으로 1만5000단어에 달하는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1년 가까이 릭트를 밀착취재하고 100명이 넘는 CNN 관계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풍부한 취재와 유려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이 기사는 비단 언론계 종사자 뿐만 아니라 글로벌 조직의 수장이 바뀌면 어떤 종류의 마찰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진제공=Josh Hallett (Flickr, CC BY 2.0)
"우리가 트럼프를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에 대해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진 않아요." 크리스 릭트는 말했다. "아주 간단한 문제거든요."

2022년 가을, 보도를 전제로 릭트와 한 여러 인터뷰 중 첫 번째였다. CNN의 새로운 수장이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재출마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다. 릭트는 얼마 전까지 인기 심야 코미디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였다. 그런데 세계적인 언론 매체의 운영을 맡은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그가 자신이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 좌우할지도 모를 질문에 대해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는 거였다.

"언론 매체가 분명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놀란 걸 감지하고 그는 빙긋 웃었다.

"정말이에요. 적어도 우리 회사에 있는 사람들은 트럼프가 자신들을 농락하고 있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를 논의해 왔어요.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저항할 겁니다."


7개월 후, 나는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릭트와 마주쳤다. 그는 교통사고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듯한 표정이었다. 평소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던 얼굴은 창백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경쾌한 목소리를 끄집어내 말했다. "뭐, 지루하진 않네요!"

우리는 세인트안셀름대학교 캠퍼스의 다나 센터 로비에 있었다. CNN월드와이드의 의장 겸 CEO인 51세의 릭트는 앞선 한 시간 반 동안 건물 뒷편에 있는 바퀴 달린 트레일러 컨트롤룸에서 트럼프가 출연하는 CNN 타운홀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릭트는 이 프로그램이 가진 잠재적 위험을 알고 있었다. 지난 6년간 트럼프는 CNN을 모욕하고 위협하며, CNN과 언론인을 "가짜 뉴스"이자 "국민의 적"으로 지목했다. 이러한 발언은 살해 위협과 블랙리스트, 궁극적으로 트럼프와 CNN 경영진 사이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구시대의 일이었다. 2022년 5월 CNN의 수장으로 취임하며 릭트는 공화당 지지자, 그리고 공화당 지도자와의 관계 재편을 약속했다. 직원들에겐 CNN이 제프 저커 전 대표 체제에서 길을 잃었고, 트럼프에 대한 적대적 접근은 냉철하고 사실에 기반한 보도를 갈망하는 많은 시청자를 소외시켰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릭트는 두 개의 전선(戰線)에서 싸우게 됐다. 하나는 CNN을 떠난 공화당원의 마음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릭트가 자신의 상사 데이비드 자슬라브의 비위를 맞추고자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CNN 기자들의 마음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데이비드 자슬라브는 CNN을 이념적 중도로 이끌겠다는 결정을 내세워 릭트를 고용했다.

취임 후 1년쯤 지난 시점에서 릭트는 두 전선 모두에서 패색을 보이고 있었다. 트럼프 퇴임 이후 하락세를 보이던 시청률은 최저 기록을 경신했다. 직원들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회사 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릭트는 뉴스 산업 전반을 부흥시키겠다는 포부로 이 자리를 수락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트럼프가 주류 언론을 망가뜨렸으며 자신의 목표는 오로지 "저널리즘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릭트는 CNN 뉴스룸의 신뢰를 잃었다. 릭트가 황금 시간대에 트럼프를 CNN에 출연시키면 공화당 시청층을 확보함과 동시에 직원들에게 자신이 CNN과 미디어 전반에 대한 혁신적 비전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줄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트럼프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트럼프는 맨체스터에서 70분 동안 계속해서 왜곡과 과장, 거짓말을 쏟아부으며 CNN 측 진행자 케이틀란 콜린스를 압도했다. 방청석을 메운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가 콜린스를 공격할 때마다 기뻐하며 악의적인 응원을 시끄럽게 펼쳤다. 언론 토론회 형식으로 시작됐던 행사는 첫 번째 유권자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WWE 프로레슬링 경기로 변해 버렸다. 빈스 맥마흔이 와도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연출은 못했으리라. 트럼프는 기득권층에게 미움을 받고 대중에게는 사랑받는 영웅적 투사로서 부당하게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으려는 프로레슬러였고, 콜린스는 선량한 주인공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악랄한 엘리트 빌런을 맡은 듯 했다.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군요." 트럼프는 첫 번째 광고가 나가는 휴식 시간에 무대 밖에 서 있던 콜린스를 가리키며 방청객에게 말했다.

(맨체스터 AFP=뉴스1) 정윤미 기자 = 10일(현지시간) 미국 뉴햄프셔주 맨체스터 소재 안젤름대에서 취재진들이 미 CNN방송이 주최한 타운홀미팅에서 출연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보고 있다. 2023.5.10 ⓒ AFP=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럼프는 자신의 행동을 두고 '이게 바로 릭트가 원했던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거래로 유명했던 그는 CNN 경영진과의 협상 과정에서 '이 프로그램으로 CNN이 무엇을 얻겠느냐'고 자신의 보좌진에게 대놓고 물었다. CNN이 방청석을 공화당원으로 채우기로 하자, 트럼프는 릭트에겐 CNN의 침체된 시청률을 되살려줄 황금 시간대 볼거리가 간절하다는 점을 짚어냈다. 트럼프와 릭트는 무대 뒤에서 잠깐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릭트는 트럼프에게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고 말했고, 트럼프는 그 말대로 했다. 그는 프로그램에서 E 진 캐럴을 비하하기도 했다. 이 방송 하루 전, 배심원단은 트럼프가 캐럴에 대한 성적 학대에 책임이 있다고 평결했다. 그는 방송에서 이미 허구임이 드러난 선거 사기에 대한 주장을 거듭했고 자신이 다시 대통령이 되면 남부 국경에서 가족 분리 정책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했다. 또한 콜린스를 "불쾌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모욕했고, 관중들은 이에 동의하며 야유를 보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콜린스는 광고가 끝난 후 트럼프와 함께 무대에 오르며 앞에 있는 거대한 빨간색 CNN 로고를 밟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트럼프는 로고를 밟을 듯한 제스처로 화답했고, 방청석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다.

릭트는 이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물론 그는 20년 가까이 쇼 프로그램을 만들며 시청률에 목을 매왔던 사람이다. 하지만 5월 맨체스터로 향하던 릭트에겐 '단 하룻밤에 CNN의 시청률을 하위권에서 끌어올리겠다'는 것보다 더 큰 야망이 있었다. 그는 트럼프가 처음에 정치적 상승세를 탔던 까닭에는 보수적 견해와 공화당 유권자를 소외시킨 CNN의 관행도 있었다고 여겼다. 2024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이를 바꿔야 했다. 릭트는 열성 MAGA 지지자들을 촬영장에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타운홀 방송 며칠 전, 그는 방청객 구성이 '트럼프 마라탕 버전'이 될 것 같다는 CNN 예상에 대해 경영진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트럼프가 무섭지도 않았다. 릭트는 기자들에게 트럼프와 같은 깡패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실을 가지고 맞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콜린스는 그 말대로 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콜린스를 둘러 싼 환경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협잡꾼과 일대일로 맞붙는 것도 어려운데, 무려 300대 1의 대결이었다. 방송은 트럼프 선거 캠페인 광고가 돼 버렸다. 포퓰리즘의 용사 트럼프가 자신의 오랜 숙적을 쓰러뜨리고 텔레비전에서 대통령직은 원래 자신의 것이라고 우긴 것이다.

"CNN은 이 프로그램을 트럼프 선거 캠프에 대한 현물 기부로 칠까요?" 오랜 관록의 방송인 댄 레더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CNN을 향해 쏟아지던 비판과 비교하면, 레더의 평가는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었다. "이거 어떻게 끝날지 알겠네요. 끔찍한 발상이었어요." 보수 성향의 작가 라메시 포누루는 방송 시작 9분만에 이런 트윗을 올렸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민주당 하원의원은 트위터에 "CNN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썼다. 아담 킨징거 전 공화당 하원의원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불워크'의 찰리 사이크스는 트위터에 "크리스 릭트가 급격히 CNN의 일론 머스크가 되고 있다"는 트윗을 남겼다.

릭트가 나를 로비에서 마주치고는 그날 밤이 지루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가 얼마나 후폭풍을 확인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하나 분명했던 건 상황이 매우, 몹시 나쁘다는 걸 릭트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원도 CNN에 분노했다. 민주당원도 CNN에 분노했다. 언론인도 CNN에 분노했다. 유일하게 분노하지 않은 사람은 트럼프였다. 아마도 그가 CNN 방송에 나와 CNN을 망신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인 듯했다.

나는 릭트가 안타까웠다. '새로운 CNN'을 구축하겠다는 그와 작년 한 해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나는 종종 그의 저널리즘 원칙에 동의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언론계 일각에선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훼방놓으려 했던 사람에게 멍석을 깔아줘서는 그 어떤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없다며, 애초 타운홀을 연 릭트를 맹렬히 비난했다. 릭트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트럼프는 가장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였고 2년 후 백악관에 입성할 가능성이 높았다. 언론에겐 그를 면밀히 검증하고 인터뷰하고, 그래, 멍석도 깔아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세인트안셀름 강당에 들어갔을 때, 주변을 둘러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CNN이 예상했던 공화당원 및 공화당 성향의 무당파가 모인 광경이 아니었다. 방청객 대부분은 카페에 와서 정책 관련 질문을 하기 보다는 MAGA 슬로건이 담긴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석할 것 같은 열혈 지지자, 사생팬, 정치 광신도였다. 이들은 선의로 열리는 시민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다. 언론에 대한 트럼프의 계속되는 공격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에 집결한 것이었다.

CNN에 대한 릭트의 이론--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고쳐야 하며, 이것이 언론 산업 전반을 발전시킬 까닭--은 매우 타당했다. 이론의 실행은? 그건 다른 이야기였다.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커다란 결정부터 작은 전술적 움직임까지, 그의 행보는 모두 역효과를 낸 듯했다. 대부분의 지표에서 릭트가 이끄는 CNN은 역사적 하한가를 찍었다. CNN 직원 100여 명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CNN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릭트에겐 큰 승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럼프 타운홀은 바로 그런 승리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반드시 그런 승리가 돼야 했다. 하지만 실행은 또 다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를 강당 바깥쪽 복도로 데려가며, 릭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나는 그가 CNN의 "사명"이라 말한 것을 놓고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토론했었다. 나는 릭트에게 이번 타운홀이 그 사명을 조금이나마 진전시켰는지 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 말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르죠." 릭트가 대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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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subin.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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