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지갑을 더욱 얇게 만드는 요즘, 식품업계의 고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라면, 빵 등 주요 먹거리에 대한 가격 인하를 유도하고 있지만 경영상황은 여전히 녹록치 않습니다. 업계서는 가격을 올리는 대신 용량을 줄이거나 크기를 작게 만드는 등 고육지책을 내놓기도 하는데요. 아이들의 간식 물가도 오르는 분위깁니다. 바로 어린이들의 최애(가장 좋아하는) 간식, 하리보 젤리의 제품 용량이 줄어든다는 뉴스가 나온 것인데요. 기존 편의점에서 100g짜리로 판매되는 제품이 80g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는 조금 덜 먹더라도 아이들에겐 부족함 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부모 마음인데 이모저모로 식료품 가격 인상의 대세를 막기가 쉽지 않은 듯 합니다.
뜬금없이 왜 인플레이션 이야기를 했냐고요?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의 주인공이 바로 하리보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다면 하리보가 성일까요 이름일까요? 정답은 둘 다 아닙니다. 바로 하리보는 ‘별걸 다 줄이는’ 요즘 MZ세대에 걸맞는 줄임말입니다. 하리보는 창업자의 이름인 한스 리겔(‘HA’ns ‘RI’egel)과 하리보가 탄생한 도시 본(‘BO’nn)의 머리글자의 합성어(HA+RI+BO)입니다. 재미있죠?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리보가 가장 MZ스러운 작명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창업자인 한스 리겔 1세는 1893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위치한 본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사탕 제조 및 제과사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5년 동안 사탕을 제조하는 기술을 익힌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본에 위치한 하이넨 사탕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성실하고 근면했던 그는 나중에 비즈니스 파트너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직원에서 시작한 그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더해 ‘하이넨&리겔’ 사탕가게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사업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수완을 발휘해 결국 1920년 자신의 이름과 도시의 이름을 더한 하리보를 창업합니다.
위대한 창업자들이 그러했듯이 하리보의 시작 역시 소박했습니다. 자신의 집 뒷마당에 딸린 작은 세탁실에 설탕 한 자루를 쌓아두고 화덕, 석판, 구리 주전자와 롤러를 이용해 직접 대리석 석판 위에서 사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첫 직원인 게르트루드는 1921년 한스 리겔과 결혼하며 하리보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갔습니다. 게르트루드는 현재의 하리보를 만드는데 남편 못지 않게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직접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사탕을 배달했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한스 리겔의 조력자 역을 톡톡히 했습니다.
부부가 바삐 지내며 사업을 꾸려나가던 1922년, 평소처럼 배달에 나섰다 돌아오던 한스 리겔은 장터에 들렀다 서커스 공연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서커스에서 재주를 넘는 곰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연구끝에 그는 마치 공연하는 서커스 곰처럼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서 있는 곰을 표상화한 금색 젤리인 ‘춤추는 곰(Tanzbar)’을 탄생시킵니다. 현재 하리보를 대표하는 ‘골드베렌(Goldbaren)’의 원조가 바로 이 춤추는 곰입니다.
지금의 골드베렌보다 좀 더 키가 크고 날씬했던 춤추는 곰 젤리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지치고 무기력했던 독일인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또한 당시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던 독일인들에게 두 마리에 단돈 1페니라는 저렴한 가격은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간식으로 입소문이 났습니다.
그렇게 사업이 번창하며 1923년 하리보는 아예 광고표지를 부착한 배달 차량을 구매해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흔하지 않은 자동차에다 하리보 광고까지 하면서 빠르게 배달까지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덕에 하리보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아내가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다녀야했던 수고로움을 던 것은 덤이고요. 그러던 사이 부부 사이엔 3명의 자녀도 태어났습니다. 1923년 장남 한스 리겔 2세에 이어 1924년 딸 아니타, 1926년 아들 파울 리겔이 태어났습니다. 향후 두 아들은 창업자인 아버지를 이어 2세 경영을 성공적으로 이어 나가게 됩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습니다. 1925년엔 감초를 이용한 감초 스틱을 출시해 시장에 인기를 얻었고 1933년엔 본에 생산 공장을 완공해 대량생산의 초석을 다집니다. 현재 하리보를 대표하는 슬로건인 ‘하리보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역시 이 무렵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직원 수만 400명에 달하는 중기업으로 성장하며 회사는 탄탄대로를 달려 나갔습니다. 하지만 100년 기업 하리보에 겹악재가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목을 잡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며 젤리 수요가 떨어진데다 설탕 등 각종 원자재의 부족으로 생산도 어렵게 됐습니다. 많은 직원들이 전쟁에 동원되며 생산 인력조차 부족해집니다. 그 와중에 창업자 한스 리겔이 5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회사를 이끌어나갈 한스 리겔 2세와 파울 리겔이 소련의 전쟁포로로 잡혀갑니다. 결국 직원 수는 10분의 1 수준인 30여명까지 줄었고 그렇게 끝없이 성장할 것 같던 하리보는 최악의 위기를 직면합니다. 위기는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주인공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리보의 첫 번째 직원이자 창업자의 아내 게르트루드입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 남편에 이어 회사 경영에 나섰습니다. 영국 군 기관을 설득해 하리보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확보와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운영 보장을 요청했고 폐업위기에 처했던 회사는 근근이 경영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최악의 위기를 버텨낸 뒤 또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고 두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리겔 형제는 회사 경영의 최전선에 나섭니다. 한스 리겔 주니어는 제품 판매와 마케팅 등 경영전반을 총괄했고 동생 파울 리겔은 제품 개발 및 생산관리를 책임지며 빠르게 재건에 나선 것입니다. 아들들의 사업 수완은 부모 못지않게 빛났습니다. 경영을 시작한 지 5년만에 다시 직원은 1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사탕 회사와 관련 기업들을 인수하며 독일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해나갔습니다.
아버지가 개발했던 춤추는 곰의 후속작도 아들들의 손에서 탄생합니다. 1967년 하리보는 회사를 상징하는 골드베렌을 만들어냈습니다. 춤추는 곰보다 키가 조금 작고 대신 통통하게 생긴 황금색 곰들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하리보 제품 라인 중에서 독보적인 매출 1위 제품으로 매일 2억개 가량이 생산되는 대표작입니다.
그렇게 글로벌 1위 젤리 브랜드 하리보는 전세계로 뻗어나가며 아이들의 친구가 됐습니다. 현재 100여개 국가에 1000여 종의 젤리를 공급하고 있는 하리보는 2018년 본사를 그라프샤프트로 옮겨 최첨단 생산공장을 갖춥니다. 또한 미국 시장 진출 30년만에 첫 북미 공장을 건설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의 위용을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67년간 하리보를 이끈 한스 리겔 주니어 회장은 유럽의 최장수 경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그의 조카이자 파울 리겔의 아들 한스 귀도 리겔이 3대째 하리보 경영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명품 브랜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가족경영의 역사속에서 돋보이는 가족경영의 표본이라 불리는 하리보. 젤리 외길을 파 현재의 위치까지 오르기까지 수많은 고비도 있었지만 결국 리겔 가문의 장인정신이 이를 돌파해낸 원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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