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앞바다에 넘쳐나던 이것들이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를 이끌었다 [역사를 바꾼 사물들]
1853년 미국의 매튜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왜 에도만(도쿄만) 앞바다에 나타나 일본의 개항의 요구한 것일까? 6개월이나 걸리는 먼 바닷길을 뚫고 와서 낯선 나라에 대포를 겨눈 것일까? ‘고래’ 때문이었다.
당시 포경업은 미국의 대표적인 성장산업이었고 일본 주변 바다는 가장 풍족한 고래 어장이었다. 대박의 꿈을 안은 미국의 고래잡이 배들이 이 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렇다보니 이 지역에 포경선을 위한 보급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이 중동의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2차 세계대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바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을 개항과 근대화의 길로 이끈 것은 일본 근해를 유영하는 고래떼였다.
먼저 고래잡이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우리나라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에 뚜렷하게 기록된 것처럼 고래잡이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벌여왔던 주요 경제활동 중의 하나다.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의 바스크족 사람들이 7~8세기부터 상업적인 포경산업을 이끌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금요일과 성스러운 날에 육식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날 ‘고기맛이 나는 생선(당시 사람들은 고래도 생선이라고 생각)’을 많이 찾아 고래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고래 고기 수요 증가로 바스크족은 고래잡이로 많은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파리 등 유럽의 도시민들은 고래의 혀를 좋아했는데 오늘날 프랑스령 바이욘느에선 바스크 상인들이 고래 혀를 독점적으로 공급해서 큰 돈을 번 것으로 전해진다.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지녔던 바스크족이 고래를 따라가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대구잡이에 나섰던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캐나다 뉴펀들런드에 도착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바스크족도 이 해로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바스크족이 16세기에 뉴펀들랜드에 고래잡이 원양기지를 운영한 것은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이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18세기 이후 고래잡이산업의 중심이 뉴펀들랜드에서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남하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주민들, 특히 퀘이커교도들이 포경산업에 적극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바로 소설 ‘모비딕’에서 포경선 피쿼드호가 출항했던 매사추세츠의 뉴베드포드 (New Bedford)였다. 1840 년대 세계의 바다에 떠 있던 포경선 700여척 중 400여척이 뉴베드포드를 모항으로 두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뉴베드포드는 ‘세계를 밝힌 도시’로 불렸다.
당시 포경산업을 키운 것은 양초기술의 발달과 산업혁명이었다. 고래기름으로 만든 양초가 개발됐는데 이것은 다른 기름으로 만든 양초처럼 연기와 냄새가 나지 않아 인기가 높았다. 비싸게 거래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산업혁명이 고래기름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가 무서운 속도로 보급되고 있던 상황인데 기계의 윤활유로 고래기름보다 좋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름은 기계 사이에서 굳어서 엉겨 붙을 위험성이 있었지만 고래기름은 전혀 그런 위험성이 없었다.
고래 기름은 이밖에 식품, 비누, 향수의 베이스 오일로 사용됐고 고래수염은 코르셋, 우산 살, 낚싯대 재료로도 활용됐다. 말하자면 포경산업은 19세기의 정유산업이자, 석유화학산업, 뷰티 산업이었던 셈이다.
당시 미국의 포경선은 연근해를 벗어나 세계의 대양을 일주하면서 고래를 포획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위해 미국 해군은 전 세계 바다를 조사해서 고래 분포도를 작성해서 배포하기까지 했다. 1851년 미 해군이 제작한 ‘고래 분포도(whale chart)’를 보면 태평양 어장에 고래가 넓게 분포돼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의 쓰가루해협 인근 해역을 중심으로 좁은 지역에 고래가 밀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최대의 섬인 혼슈와 훗카이도 사이의 바다가 쓰가루해협으로 이곳을 통해 동해가 태평양으로 이어진다.
1853년 2월 7일자 ‘뉴욕타임스’는 “현재 태평양 어장에서 종사하는 미국의 어선과 선원들의 수는 각각 650척과 1만5000명 이상이며, 이것은 우리 국민들이 포경업을 거의 독차지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기록했다.
1854년 2월 페리 제독이 통역과 나눈 대화를 보면 얼마나 많은 포경선이 이곳에서 고래를 잡는지 알 수 있다. 페리 제독은 통역에게 이렇게 물었다.
“1년 동안에, 미국 배 160척이 쓰가루 해협을 빠져 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배가 동해로 오고 있는가?”
미국 매사추세츠의 낸터킷항을 출항한 ‘모비딕’의 피쿼드호도 당연히 일본 근해로 향했다. 피쿼드 호는 미국 동부 연안을 떠나 대서양을 따라 남하한 후, 인도양을 북동쪽으로 가로지른 다음에 동남아시아 해역으로 동진한 뒤 일본근해로 진입했다. 멜빌은 1만5000해리의 이 항로를 “지금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장거리 항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피쿼드호를 비롯한 포경선들은 모두 고래잡이 성수기에 일본 근해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소설 ‘모비딕’의 등장인물 중 가장 유명해진 항해사 스타벅(그렇다, 스타벅스의 유래가 된 그 스타벅)은 “동양의 여러 군도가 그려진 항해도와 일본열도의 긴 동해안을 나타낸 또 다른 해도를 펼쳐놓고” 모비딕이 언제 어떤 경로로 일본 바다 근처를 지나갈지 추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에이헙 선장이 한쪽 다리를 잃은 이유에 대한 질문에 “음, 일본 바다 근처에서 모비딕과 싸우다 다리를 잃었지”라고 답했다.
아무튼 당시 일본 근해는 미국 포경산업에 가장 중요한 바다였다. 이로 인해 포경선 기항지로서 일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 근해에서 고래를 잡다가 난파하는 포경선도 있어서 미국 정부로서는 자국민을 구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가 필요했다.
페리 제독이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일본으로 향한 것은 이처럼 고래 때문이었다.
페리 제독의 항로 역시 ‘모디빅’의 피쿼드호가 갔던 항로를 그대로 따랐다. 대서양, 케이프타운, 인도양을 거쳐 중국 해안을 지나 220여 일 만에 에도만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만 봐도 화친조약의 목적이 포경산업 보호였음을 할 수 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시모다[下田] ·하코다테[函館]의 개항 및 항구의 유보(遊步)구역 설정, 미국 선박에 대한 식량 ·연료 ·식수의 공급, 난파선 구조, 필요품 구입, 외교관의 시모다 주재, 최혜국대우 등이었다.
일본을 ‘이중 빗장을 지른 나라’라고 했던 허먼 멜빌은 일본이 개방을 한다면 그것은 고래와 포경선 때문일 것이라고 일본의 개항 전에 썼던 ‘모비딕’에서 예측했다.
“이중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일본이 손님을 환대하게 된다면,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포경선뿐이다. 이미 포경선은 일본의 문지방을 넘으려 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됐다.
일본으로 귀국을 결심하고 캘리포니아 금광에서 돈을 모은 만지로는 1851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미국에서 듣고 배운 문물을 고위 무사들에게 전한 덕에 만지로는 막부에 초대돼 무사신분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고향 동네 이름인 나카하마를 성(姓)으로 받았다.
이밖에 사카모토 료마, 미쯔비시의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 등과 교류하며 그들에게 미국에서 배운 영어, 해운, 조선 등을 가르쳤다.
일본에 최초로 영어 노래 ‘ABC’를 소개했고 영일사전을 편찬했으며 일본 조선업 발전과 해군 창설에 직접 기여하기도 했다.
만지로는 여러 방면에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만약 조난을 당했던 만지로가 미국의 고래잡이배에 의해 구조되지 않았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조금 다른 길로 갔을 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고래는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길라잡이였던 셈이다.
동해도 고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바다였다. 1726년에 출판된 조너던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여행지도가 나오는데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한국해(sea of Corea)’로 표기했다. 이 지역 고래들이 유럽에 이미 알려졌기 때문이다.
동해의 고래를 유럽에 알린 사람이 바로 하멜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1653년(효종4)에 폭풍으로 파선해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 돌아간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저술해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따위를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하멜은 특히 동해에 고래와 청어가 많다고 전했다. 모두 유럽인들의 관심이 컸던 어종이었다.
“한번은 배가 파선되어 한국 동해에 2주일 동안 표류하다가, 일사병으로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고 살았는데, 그 찝찝한 살은 햇볕에 잘 익어서 달콤하고 쫄깃쫄깃하더라.”(문상사상사판 ‘백년동안의 고독’ p100)
서양의 포경선은 1840년부터 조선 바다에 출몰했다. <헌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됐다.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이양선(異樣船)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도의 큰 바다에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그중에는 육지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어떤 배는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했다.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1848년 12월 29일)
당시 포경선들은 ‘항해일지’를 기록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항해일지에 따르면 1848년 총 60척의 포경선이 동해에 들어왔다. 미국 포경선이 54척이었고, 프랑스 4척, 독일 2척이었다.
1849년에는 미국 포경선 130척으로 폭증했다. 페리 제독이 말한 쓰가루해협을 지나는 포경선들이 대부분 동해로 들어온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포경선도 8척으로 늘었다.
1849년 동해로 들어온 프랑스 포경선 중에 리앙쿠르호가 있었다. 430t급 포경선인 리앙쿠르호는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1849년 1월 27일 독도를 발견(?)하고 이를 보고한다. 이로 인해 국제해양법상 독도는 ‘리앙쿠르암’(Liancourt Rocks)으로 정해졌다.
엄연히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고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던 독도를 ‘발견’하고 여기에 ‘리앙쿠르암’이라고 마음대로 이름붙인 것 자체가 제국주의자들의 횡포였다. ‘리앙쿠르’는 우리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국주의자들의 발상일 뿐이다.
지난 2017년 해외토픽으로 바다에서 로또를 건져올린 어부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오만의 평범한 어부가 바다에서 거대한 똥덩어리를 건져올렸는데 그것이 28억원에 팔렸다는 것이다.
그 어부가 건져 올린 것은 바로 고래똥이었다. 고래똥은 용연향으로 불리는데 사향(머스크), 영묘향과 함께 고급 향수의 원료로 쓰인다.
향유고래가 바다에서 대왕오징어를 잡아먹는데 이 중 소화되지 않고 뭉친 것을 담즙과 함께 토해내거나, 대장 속에 있다가 똥과 함께 배설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암석처럼 굳어져 용연향이 된다. 용연향은 오직 수컷 향유고래만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는 수컷이 번식기에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몸싸움 때문에 소화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연향 이야기는 소설 ‘모비딕’에서도 나온다. 92장의 제목이 아예 ‘용연향’이다.
“더없이 향기롭고 순결한 용연향이 그처럼 부패한 사체의 한복판에 발견된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사도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부퍠와 순결에 대해 한 말을 잘 생각해보라.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라고 한 그 말을 말이다.”(문학동네판 ‘모비딕’ p629)
용연향은 고급 향수의 재료로 쓰일 뿐 아니라 일부에서는 최음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중국 황실의 궁녀들이 몸에 차고 다니던 향낭(香囊)에는 용연향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황제들이 이 향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얻기 위해 용연향을 뇌물로 이용했다. 명나라의 가정제가 용연향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은 아프리카 모잠비크 해안에서 용연향을 채취해서 이를 황제에게 상납한 것이다.
상업적 거점이 필요했던 포르투갈과 해안의 왜구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명나라의 이해가 맞아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를 허용한 것이지만 여기에 용연향, 그러니까 고래똥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마카오를 왕래하던 포르투갈 선박에 의해 일본으로 조총이 전래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것을 이용해 전국을 통일하고 조선까지 침략했으니 고래똥은 우리 역사에도 상처를 남겼다.
이들은 조디악(zodiac)이라는 이름의 고속정을 띄우고 향유고래 떼를 사냥하고 있던 소련의 포경선 블라스트니(Vlastny)호를 향해 돌진했다. 한 활동가는 이 장면을 카메라 영상에 담았다. 이때 블라스트니호의 대포에서 250파운드의 포경용 작살이 발사됐다. 이 작살은 활동가 옆을 지나 암컷 혹등고래의 등에 그대로 꽂혔다.
포경 반대 운동으로 시작한 그린피스는 그동안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린피스의 투쟁 덕분에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IWC)는 상업적 목적의 고래 어획을 아예 금지했다. 대상 고래는 수염고래, 귀신고래, 대왕고래, 참고래, 향고래, 혹등고래, 밍크고래, 브라이드고래 등 12개 종이다.
고래를 지킨 것은 그린피스가 아니라 석유와 인간이 개발한 기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마이클 셸런버거 환경진보 대표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라는 논쟁적인 책에서 “1800년대 중반 유전 개발로 등유가 생산되며 조명 연료 시장에서 고래기름을 대체했다. 1900년대 중반 식물성 기름이 마가린과 비누 원료인 고래기름 대신 쓰이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잡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8년 6월 30일, 국제포경위원회(IWC) 탈퇴하며 상업적 목적의 포경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은 지금도 일본 근해와 자국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밍크고래, 브라이드고래, 보리고래 등 3종의 고래에 대한 포획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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