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가 끄집어낸 ‘연극배우=가짜 연기’ 논란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2020년 1월5일,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골든글로브 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 수상의 흥분을 안고 그가 말한 수상 소감은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였다. 그가 언급한 '장벽'이란 바로 '자막'이다. 비영어권 외국어 영화 자막 보기에 유달리 인색한 할리우드를 의식한 발언으로,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영화다"라는 품격 있는 발언으로 마무리했다.
중소극장 연극 무대에까지 번진 '마이크 사용'
대부분의 흥행 콘텐츠가 영어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자막이 있는 콘텐츠를 꺼리는 영어권 시청자들에 비해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오히려 자막을 즐기는 편이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 영상 콘텐츠를 보려면 자막은 필수기도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자막에 익숙해진 덕분에 한국어 콘텐츠에서도 자막을 원하는 경향이 커졌다.
결정적인 것은 넷플릭스와 같은 OTT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면서다. DVD 대여 서비스라는 태생을 지닌 넷플릭스는 DVD의 자막 기능을 온라인으로 그대로 옮겨 모국어 콘텐츠에서도 자막이 나오게 해놓았다. 한국인이 K드라마를 보면서 한글 자막을 켜놓고 보는 편리함에 빠져들었다. 자막이 있으면 대사는 물론이고 지문, 효과음까지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최근 지상파·케이블TV 방송들도 자사의 인기 드라마에 자막을 탑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리어 프리 서비스 관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그렇다면 자막은 이제 한국에서 스토리텔링 영상 콘텐츠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봐야 할까. 예술 장르를 구성하는 외적인 요소에 대한 논쟁이 최근 공연 무대에서도 불거지고 있다. 바로 연극 무대에서의 마이크 사용 여부다. 연극배우들은 전통적으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늘날과 같은 음향을 증폭시키는 시스템이 없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배우들이 마음속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방백이라는 형식으로 외치는 것이 연극적 대사 전달 방식이자 형식미로 정착됐다.
반면, 뮤지컬은 연극보다 마이크 의존도가 높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연을 맡으려면 성량이 커야만 했다. 1930년대 브로드웨이를 풍미했던 에델 머먼 같은 여배우는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 놀라운 성량과 가창력을 가졌기에 불멸의 뮤지컬 배우로 아직까지도 존경받고 있다. 콘서트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전기 기타와 앰프, 스피커 시스템이 대중화돼 우드스톡 페스티벌 같은 야외 해방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연극은 대극장 뮤지컬이나 야외 록 콘서트와는 달리 소극장 중심의 관극이다. 같은 공간에서 배우가 이야기하는 대사가 그대로 관객의 귀에 꽂히는 과정을 즐기는 묘미가 크다. 이것은 배우의 발성법에 대한 기술적인 연마를 필요로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 덕분에 연극 무대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 TV나 영화 등 미디어 매체에 진출해 안정된 대사 전달력으로 호평받는 사례가 많다.
반대로 매체에서만 활동하는 배우들은 '생활 연기'를 하며 작은 음량으로 말해도 마이크가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 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연극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현상도 존재한다. 따라서 최근 상업 연극에 매체 출신 배우들이 등장하는 무대에서는 연기할 때 마이크를 착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대극장 공연이라는 이유로 사용되던 마이크가 이제는 중소극장까지 퍼지고 있다. 전통적인 연극 무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이크 사용 자체가 부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정작 그 배우의 매체 연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역시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마치 영상 매체에서 자막이 주는 편리함처럼 한국인이 한국어 대사를 현장에서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마이크 사용에 대해서도 관대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 무대에서 마이크라는 기술을 도입한 후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을 두고 '진짜 vs 가짜' 연기 논쟁이 벌어진다면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짧은 연극 무대 경력 이후 매체에서 주로 활동하며 강렬한 캐릭터 연기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손석구는 최근 연극 《나무 위의 군대》 기자간담회에서 "연극에서는 사랑을 속삭이라면서 전혀 속삭여서는 안 되는 가짜 연기를 시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발언으로 '연극 연기=가짜 연기'라는 논쟁의 프레임에 갇히게 됐다.
CG와 스턴트맨이 대신 해주는 영화도 가짜 연기?
그의 발언을 전체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가짜'라고 말한 의미가 현재 자신이 잠시 돌아와서 몸담고 있는 연극이라는 장르를 하대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기를 바라지만, 그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연기자라는 직업은 장르를 막론하고 애초부터 남의 인생을 '가짜'로 사는 직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연극배우들에게는 '속삭이는 가짜 연기'가 있다면 같은 논리로 매체 배우들은 'CG와 스턴트맨이 대신 해주는 가짜 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그는 현재 '속삭이는 연기'를 위해 마이크를 사용하고 있고, 이로써 대사 전달의 불편함을 제거했다. 따라서 가짜 연기라는 잘못된 용어 선택보다는 연극의 전통과 양식으로부터 느끼는 개인적인 불편함을 호소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그 발언만 없었다면 매체에 익숙한 배우가 '진짜 연기'를 통해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작품 외적인 논란 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연극 출연은 이미 전회차 매진이기에 많은 연극 애호가는 아마도 티켓 예매 전쟁에서 밀려나 그의 진짜 연기 도전을 볼 기회조차 가지기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보장된 넷플릭스 신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7월28일 넷플릭스 시리즈 《D.P.》의 시즌2 주요 배역으로 시청자를 찾아온다고 한다. 평소처럼 자막도 켜고 그가 매체에서 인기를 얻은 전매특허 연기를 보며 대사 하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면서 혹여 있을 다음 연극 무대 출연을 기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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