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타 고집한 김하성의 선택이 옳았다
동양인 메이저리거 최초 ‘20-30클럽’ 도전
(시사저널=김형준 SPOTV MLB 해설위원)
일본 야구의 영웅 스즈키 이치로는 미국 진출을 앞두고 2년 연속 메이저리그 캠프에 참가한다. 그리고 자신을 상징하는 '진자 타법'을 버린다. 장타력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일본에서 17개였던 이치로의 한 시즌 평균 홈런 수는 메이저리그에서 8개로 줄어들었다. 일본에서는 25개를 친 1995년을 포함해 두 번의 20홈런 시즌이 있었던 반면,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기록은 한 시즌 15개였다. 대신 이치로는 정확성으로 승부했고, 데뷔 첫해 MVP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초의 10년 연속 3할 타율, 200안타를 달성했다.
일본 야구의 자존심 마쓰이 히데키는 2002년 일본에서 5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도쿄돔을 축제로 만들었다. 오 사다하루의 55개 기록에 5개 차이로 접근한, 요미우리 4번 타자의 쾌거였다. 그러나 마쓰이는 이듬해 메이저리그 진출 후 생존하기 위해 홈런을 포기하기로 한다. 2003년 뉴욕 양키스의 4번 타자가 된 마쓰이는 3년 연속 100타점을 올렸고 2009년에는 월드시리즈 MVP가 되지만, 진출 첫해에 기록한 16개 홈런은 정면승부를 기대했던 일본 야구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이치로가 일본이 미국에 수출한 첫 번째 파워히터로 마쓰이 대신 오타니를 꼽는 이유다.
2020년 김하성은 KBO리그에서 역대 두 번째로 30홈런 100타점 100득점을 기록한 유격수가 됐다. 하지만 20도루를 동반한 기록은 유격수로서 최초였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장타력을 가진 유격수였던 김하성은 메이저리그 진출 첫해인 2021년, 8개의 홈런에 그친다. 지난해에는 11개로 3개 늘어났지만, 두 개는 큰 점수 차에서 올라온 야수를 상대로 때려낸 홈런이었다. 메이저리그는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면 투수를 아끼기 위해 일반 야수들을 마운드에 올려 던지게 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첫 2년 동안 8개와 9개를 기록한 셈이다.
시속 97마일 사이영급 투수 공도 담장 밖으로 넘겨
KBO리그 출신 타자의 홈런 감소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김현수는 2015년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며 28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자신이 작다고 생각한 미국 볼티모어 캠든야즈에서는 6개에 그쳤고, 그 이듬해에는 하나를 치고 돌아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인 박병호는 2014년에 52개와 2015년 53개를 기록했지만, 2016년 메이저리그에서는 12개에 그쳤다. 이듬해를 마이너리그에서 보내고 귀국을 결심한 박병호는 국내에 복귀한 첫해에 다시 43개를 기록했다. 2014년 국내에서 40개를 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첫해 15개, 이듬해 21개를 친 강정호만이 체면치레가 가능한 홈런 수를 기록했을 뿐이다.
김하성이 미국 진출 첫해 패스트볼 홈런을 3개밖에 치지 못하고, 2년 차에도 95마일이 넘는 공을 하나도 치지 못하자,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속도를 따라잡았던 강정호와는 달리 김하성은 수비형 내야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지난해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 최종 3인에 오른 쾌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던 이유다. 김하성 주변에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장타를 포기하고 단타 위주로 타율을 높일 것을 주문했다. 이치로, 마쓰이와 같은 축소 지향이 유일한 살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겨울 김하성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지난해 시즌이 끝났을 때의 체중이 시즌을 시작했을 때보다 10kg 감소했던 김하성은 근육량을 잃지 않도록 훈련법을 바꿨다. 그리고 장타력을 높일 수 있도록 개인 코치와 함께 스윙을 조정했다.
올해 첫 70경기에서 김하성은 지난해 숫자와 같은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장타율 0.364는 지난해(0.383)보다도 좋지 못했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침내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5월25일 워싱턴 원정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처음으로 필드의 반대 방향으로 홈런을 날리는 것으로 변화를 예고한 김하성은 약 한 달의 조정기 이후 홈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하성은 6월23일 이후 19경기에서 6개의 홈런을 날렸고, 장타율은 0.581로 치솟았다. 같은 기간 김하성보다 높은 장타율을 기록한 내야수는 라파엘 데버스(보스턴), 매니 마차도(샌디에이고), 코리 시거(텍사스) 등 3명뿐으로, 모두 3억 달러 이상의 계약을 맺은 톱 선수들이다. 한때 약한 구위의 투수들만 공략한다고 해서 '구위 판독기'로 불렸던 김하성은 이제 시속 97마일(156km)도 치고 사이영급 투수의 공도 친다.
"김하성은 샌디에이고의 엔진, 팀에 긍정적 영향 전염시켜"
투수로 하여금 메이저리그에서 공을 가장 많이 던지게 하는 타자이자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에 방망이를 내는 비율이 6번째로 낮은 타자이며, 전 포지션을 통틀어 수비 기여도가 가장 높은 김하성이 수준급 장타력까지 장착하자 야수 김하성의 가치는 지붕을 뚫어버렸다. 7월17일 현재 김하성이 올린 승리기여도(WAR)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로날드 아쿠냐(애틀랜타), 무키 베츠(LA 다저스), 완더 프랑코(탬파베이)에 이어 투타 통합 5위에 해당한다. 나머지 네 명은 MVP 후보들이다.
지난해의 11개를 넘어 20개 홈런을 노리는 김하성은 또 다른 대기록에 도전한다. KBO리그 때부터 출중한 도루 실력을 자랑한 김하성은 벌써 17개를 기록함으로써 30도루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6개를 추가하면 추신수가 2010년에 이룬 22개 한국인 선수 기록을 경신하며, 20홈런 30도루 달성이 가능하다. 추신수는 20홈런 20도루를 두 번 했지만 20-30은 달성한 적이 없으며, 일본인 선수도 마찬가지다.
김하성의 20-30이 더 큰 가치를 가지는 건 김하성이 내야수, 그중에서도 수비 부담이 가장 큰 유격수와 2루수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이를 달성한 미들 인필더(2루수 또는 유격수)는 진 세구라(2012)와 호세 알투베(2016, 2017) 두 명뿐이며, 1969년에 창단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는 2021년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가 유일하다. 그리고 여기에 김하성은 타티스가 따내지 못한 골든글러브까지 추가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겨울 막대한 투자를 하고도 포스트시즌 진출이 힘들어지고 있는 샌디에이고에서 김하성은 팀의 붕괴를 막아내고 있는 버팀목이다. 고액 연봉 선수들의 부진에 머리가 아픈 밥 멜빈 감독은 "김하성은 샌디에이고의 엔진이며, 다른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염성 있는 플레이를 한다"는 극찬을 했다. 4년 2800만 달러 계약이 내년으로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되는 김하성은 샌디에이고 내에서 연봉 대비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 선수다.
메이저리그도 김하성의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는 내년 3월 최고의 인기 구단인 LA 다저스와 김하성의 소속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서울에서 공식 개막전을 한다고 발표했다. 이벤트 경기가 아닌 공식 개막전이 아시아에서 열리게 된 건 도쿄에 이어 두 번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처럼 자신의 팀을 이끌고 오는 것이다. 최고의 수비를 자랑하며 20개 홈런과 30개 도루를 기록하는 내야수. 메이저리그의 벽에 정면으로 맞선 김하성은 야구팬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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