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문화정치] 하물며 '시럽급여'라면 더욱 필요하다: 말의 정치, 그 폭력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2023. 7. 2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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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언론에 생산적인 논쟁이나 창의적인 정책에 관한 토론이 보이지 않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대신 한국의 정치는 부정확, 부적절, 무책임, 따라서 무용한 말들의 경쟁터가 된 듯하다. 이 상황에선 공동의 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호 협조적인 교섭이나 대화가 사라진다. 반대로 (내게는) 통쾌하고 (너에겐) 모욕적인 말폭탄이 승부를 겨루는 무기가 된다. 이른바 (내게는) '사이다', (네겐) '고구마'라며 띄우거나 누르며 말꼬리를 이어가는 미디어도 이 현상의 악화에 한몫한다.

그 부작용은 심각하다. 기형적인 승부욕만 넘치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말폭탄으로 사회적 가치나 정치적 희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더욱 치명적인 건, 이 나쁜 말들은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공격의 목표로 먹어 삼키며 더 증폭하고 악해진다는 사실이다. 빈곤한 이들, 서울공화국 바깥에서 살고 있는 이들,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지 못했고 경력이 단절된 다수의 젊거나 나이든 여성과 남성들이 주된 사례다.

'시럽급여'란 말의 무의식

말폭력의 최근 사례로 '시럽급여'가 있다. 실업급여를 '밝은 얼굴'로 찾아와 해외여행을 가거나 고급 선글라스를 사는 목적으로 악용하는 일부 집단을 지적한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달콤한 보너스'로 '시럽급여'가 되기 전에 실업급여 하한액 축소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7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실업급여 제도개선 공청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국민의힘 홈페이지

이 말은 여러 이유에서 문제적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접하는 대학 졸업생들이 종종 구직 지원의 실업급여로 생활하며 앞날의 취업을 준비하는, 어둡고 고된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적으로 이 발언은 정책 발의의 기본적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부'라는 부정의 지시어로, 부도덕하고 게으른 나쁜 집단을 생성한 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나는 '실업급여'도 아니고 하물며 '시럽급여'라면 그 적절한 지급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상황이 어떠하면 의존할 게 오로지 시럽이겠는가. 단지 시럽 한 방울로 인생을 살아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시럽의 한정성 따라서 불가결성을, 비극적으로, 실감한다.

그러므로 인생 전부가 시럽인 사람은 그 한방울에만 의지해야 하는 사람을 탓할 자격이 없다.

슬픔과 존중을 받을 자격의 평등함

국제적으로 저명한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의 저서 <이것은 어떤 세계인가>에서 '삶의 정치(politics of living)'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삶의 정치는 사회·경제·정치적 평등을 조건으로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슬픔을 받을 수 있음 (grievability)'의 평등성을 윤리로 삼고 있다.

그녀가 주목하는 현재의 문제는 '경제의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해지는 현상이다. 물론 귀하고 비싼 사람들이라면 이 계산법에 의해 희생될 리 없다. 대신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적은, 작고 낮은 사람들이 희생의 대상으로 선별된다. 이들은 평소엔 존재 자체도 인정되지 않다가 경제 수치를 맞추기 위해 족집게로 찍어낼 때만 눈에 띈다. 그리고 아낌없이 버려진다. 그들의 부재는 기억되지도 애도되지도 않는다. 슬픔을 받을 자격이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럽급여'의 발단은 이른바 재정의 합리화 목표에서 비롯했단다. 대통령은 '혁신마인드'를 말하며, 재정을 '꼭 필요한 부분에만 돈을 쓰도록' 당부했다(한겨레 <실업급여 관심 없던 국힘은 왜 갑자기 '시럽급여' 꺼내들었나>). 다시 말해,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생명이기에 이들을 살피는 비용은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로 처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지배적이다.

이 논리에서는 생산성이 0인 사람이 여행을 하거나 물건을 사면, 심지어 밝은 얼굴을 하면 죄인으로 비난받는다. 슬픔 또한 사치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미 자살지수, 남녀 소득 격차, 가계부채, 출생률 등에서 국제적으로 최하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렇듯 사회적 삶의 불량함을 명시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수치 형태들을 앞에 놓고 그나마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들먹이는 일 자체가 옹색하고 치졸한 무능력의 소치다.

일본의 사상가인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이 실업급여를 받을 때 가장 좋았던 점은 -생존의 다행함도 아니고, 생산적인 미래계획을 세울 수 있었음도 아니고- 자신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더라도 살아있을 만한 존재로 '존중'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즉 실업급여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존중하기 위해, 그 상실을 슬퍼할 줄 알기 위해, 사회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 7월17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실업급여 신청 창구가 분주하다. ⓒ 연합뉴스

말꼬리를 늘여보자면

나는 과연 한 달에 2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실업급여로 여행을 간다면 얼마나 멀리, 많이 가겠으며 상품을 산들 얼마나 사겠는지를 생각해본다. 고작해야 시럽같이 작은 한방울인데. 더욱 솔직하게는 그 작은 방울로도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이 가까운 곳으로라도 떠나고 물건을 사면서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백번 양보해서, 이들이 시럽을 어찌저찌 쪼개고 모아 모처럼 기분을 냈다고 치더라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거대한 비용을 들여, 경호원 열명 넘게 거느리며 해외의 쇼핑가를 행보하다가 (주장하듯) 호객을 당해, (역시 주장하듯), '눈'쇼핑하게 되어 시간과 비용을 버리고, 궁극엔 '정쟁화'를 겁내며 꼬리를 감추는 일 따위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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