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어권 과학자 울리는 ‘영어’ 장벽...유능한 과학자도 고개 숙인다

이정아 기자 2023. 7. 22. 13:4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원어민보다 영어 논문 쓰는 시간 2배, 둘 중 하나는 학회 발표 포기
과학계에서 연구 성과를 발표하거나 토의를 할 때에는 공용어로 영어를 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비영어권 과학자가 해외 과학자와 교류하거나 국제 학계에 진출하는 데 영어가 크나큰 장벽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어 논문을 읽거나 영어 발표를 준비하는 시간만 영어권 과학자의 2배가 걸렸다. 사진은 독일 막스플랑크 프리츠하버연구소에서 심포지엄을 하는 모습./Jelena Tomović, Fritz Haber Institute of the Max Planck Society

한국인을 비롯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비영어권 인구는 전 세계의 95%나 된다. 그러나 과학계를 비롯한 거의 모든 학계와 외교 무대에서는 대부분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한다. 다르게 말하면 학계와 외교 무대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데 영어 실력이 꽤나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과학자가 외국 과학자와 공동 연구하거나 학계에 진출하는 데 영어가 크나큰 장벽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어가 모국어인 과학자에 비해 비영어권 과학자는 논문을 읽는 데에만 2배의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영어권 과학자 2명 중 1명은 영어 때문에 학회에서 발표하는 것을 피하며, 자기 연구를 소개하는 일조차 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학계에 나갈 만큼 본인 분야에서 인정 받은 과학자인데도 영어가 두려워서 상당수가 해외 연구자와 교류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뜻이다. 과학계가 나서서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편히 참여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어 논문 쓰는 시간 2배, 둘 중 하나는 영어 발표 피해

호주 퀸즈랜드대와 미국 UC 버클리대, 영국 옥스포드대, 독일 헬름홀츠 환경연구센터 등 연구진은 과학자가 영어로 논문을 읽거나 쓰고, 저널에 발표하고, 학회 활동을 하는 데 들이는 노력을 시간과 재정적 비용으로 정량화한 결과를 지난 18일 국제학술지 ‘플로스 바이올로지’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전세계 과학자 908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국적은 영어권인 영국이 112명이고 일본 294명, 스페인 108명, 방글라데시 106명, 볼리비아 100명, 네팔 82명, 우크라이나 66명, 나이지리아 4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국제 학술지에 최소 1번 이상 동료 검토 논문을 발표했던 유능한 과학자들이다.

그래픽=정서희

조사 결과 시간과 재정적인 비용 모두에서 비영어권 과학자가 영어로 학계 활동을 하는 데 비교적 큰 어려움이 있음이 수치상으로 밝혀졌다.

비영어권 과학자가 논문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영어권 과학자의 2배나 됐다. 영어 논문 한 편을 꼼꼼히 읽는데 영어권 과학자는 보통 40분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비영어권 과학자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어도 이들보다 21.31분이 더 걸렸다. 영어를 잘 못하는 과학자는 영어권 과학자들보다 40.18분이나 더 오래 걸렸다. 과학자들이 연간 논문을 200개씩 읽으며 하루 근무 시간이 7시간이라고 가정하면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과학자는 논문을 읽는 데에만 연간 19.1일을 더 들이는 셈이다.

영어 논문을 쓰는 시간은 비영어권 과학자가 50.6%나 더 오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어권과 비영어권 과학자 간 논문을 읽거나 쓰는 데 드는 시간 차이는 경력이 길수록 점점 좋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자기 모국어로 논문을 읽거나 쓰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영어권 과학자들이 영어로 읽고 쓰는 것보다 훨씬 짧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영어 장벽 때문에 훨씬 불리하다는 증거라고 꼽았다.

영어 논문을 쓸 만큼 영어를 잘해도 여전히 학계 활동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비영어권 과학자는 자기가 쓴 영어 논문의 75% 이상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전에 원어민에게 교정을 요청했다. 반면 영어권 과학자가 자기 논문을 매끄럽게 교정해 달라고 전문가에게 요청하는 비율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논문을 투고한 뒤에도 장벽은 이어졌다. 작문의 문제로 논문이 거절된 확률은 영어권 과학자 14.4%, 비영어권 과학자 38.1%로 2.6배나 더 컸다.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들이 영어권 과학자들의 논문을 더 많이 수용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논문을 수정해서 다시 보내라는 요청도 비영어권 과학자가 12.5배나 더 많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외에도 비영어권 과학자가 학회를 위해 영어 발표를 준비하고 연습하는 시간이 93.7%나 더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영어권 과학자의 50%는 영어 때문에 학회에서 발표하기를 포기했다고 답했다. 심지어 65%는 자기가 무슨 연구를 하는지를 영어로 소개하는 것조차 종종 또는 항상 어렵다고 답했다. 30%는 학회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회의를 종종 또는 항상 피한다고 답했다.

이전에도 비영어권 과학자가 영어 때문에 학계 활동이 힘들다는 보고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영어권 과학자에 비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정량적인 분석은 없었다.

◇전지구적 문제 해결하려면 과학계가 영어 장벽 무너지도록 도와야

과학계가 나서서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편히 참여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지속적으로 해외 과학자들과 교류하고 국제 학회에서 학술활동을 하려면 결국은 영어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UBC Okanagan

연구진은 과학계가 공용어로 영어를 쓰면서 글로벌해지고 더욱 발전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이를 위해 그동안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고 지적했다. 다른 모든 연구 환경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해도 영어로 인한 과학적 생산성에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경력이 아직 길지 않은 젊은 과학자들이 영어 때문에 다른 동료와 교류하고 협업할 기회를 빼앗기고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이러한 언어적인 불평등이 국가간 연구 성과 불평등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과학계가 영어 장벽으로 인한 불평등과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예로 지난 2021년 유네스코가 ‘과학계에서 형평성과 공정성, 다양성, 기회의 평등, 협력 등 핵심 가치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때도 비영어권 학자들이 맞닥뜨린 언어적 평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연구진은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영어를 모국어만큼 하도록 기대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학계에 편히 진출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비영어권 과학자들이 영어 때문에 들이는 추가적인 시간과 비용,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제 학술지들은 연구자들이 스스로 영어 논문을 완성해 투고하기를 기다리기보다, 특히 저소득국가 과학자들에게 무료 또는 저렴하게 영어 교정과 번역 서비스, 번역 AI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내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던 한 물리학과 교수는 “유학 초기에는 영어 때문에 무척 힘들었지만 6개월이 지난 다음부터는 적어도 내 분야에 대한 대화를 하는 데는 어려움이 사라졌다”며 “해외 학계에 처음 나가본 젊은 과학자들에게 번역 서비스나 AI를 제공하는 것은 참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결국 그들도 지속적으로 국제 학회에서 학술활동을 하려면 영어로 논문을 쓰고 토론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그들이 학회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영어 실력이 늘도록 교육하는 등의 장기적인 방안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이나 기후위기 등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 세계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호 교류를 해야 한다. 연구진은 전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과학계가 더욱 발전하려면 언어, 즉 국가와 인종, 환경이 서로 다른 과학자들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내고 각자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자료

PLOS Biology(2023),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bio.3002184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