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인과성 법정 다툼 승소 배경은 '기저질환 역공'…'입증책임 전환'도 시사
기저질환 싸움 이긴 것은 유일무이
재판부 “입증 책임 접종자가 안 져도 돼”
유사 재판 ‘줄승소’ 청신호 예고
유족 “신뢰 저버린 국가에 허탈…이제야 당연한 귀결”
“정부 측 기저질환 주장을 역이용한 것이 이번 재판에서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행정소송에서도 같은 전략이 먹혀들 수 있어서 희망적입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이후 사망한 30대 남성의 유족이 최근 질병관리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기저 질환을 이유로 백신 접종과 사망 간에 인과성이 없다고 판단한 질병청의 피해 미보상 결정을 뒤엎은 것인데, 재판을 제기한 유족과 변호사는 “인제야 잘못된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진짜 싸움의 시작”이라며 변화를 예고했다. 사정이 비슷한 접종자와 가족들도 향후 비슷한 소송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며 재판부의 결정을 반겼다.
이 재판을 이끈 법무법인 하신의 안나현 변호사는 22일 “정부에서 기저질환으로 주장하는 해면상혈관종 사망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을 입증, 부각했다”며 “재판부도 원고의 기저질환이 사망을 초래할 만큼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앞서 서울행정법원 제4부(재판장 김정중 부장판사)는 지난 7일 코로나19 예방접종 뒤 사망한 남성의 아내인 김효연(34) 씨가 질병관리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코로나19 예방접종 후 이상반응 피해보상 거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받아들였다.
김 씨의 남편인 오현세(사망 당시 34세) 씨는 2021년 10월 22일 코로나19 화이자 백신을 1차 접종하고 이틀 뒤 왼쪽 팔 저림과 마비 증세를 호소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오 씨는 나흘 뒤인 2021년 10월 28일 숨졌다. 김 씨는 남편이 백신 접종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감염병예방법)에 근거해 질병청에 보상을 신청했다. 하지만 질병청은 오 씨의 사망 원인이 뇌출혈이라는 부검 소견에 따라 오 씨의 사망과 백신 접종 사이에 인과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피해보상 거부 처분을 내렸다. 당시 질병청은 코로나19 예방접종 이후 이상반응 인과성 평가 연구에서 백신 접종과 뇌졸중(뇌출혈 등) 간에 연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제시됐음을 처분 근거로 들었다.
▮인과성 불인정 ‘단골메뉴’ 기저질환 논리 역공해 승소
하지만 재판부는 질병청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부검 결과 오 씨의 뇌내출혈 부위에서 해면혈 관종이 발견됐는데, 법원은 해면혈 관종이 뇌출혈을 야기할 수 있는 사실을 짚으면서도 오 씨의 사망이라는 결과가 백신 접종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서만 발생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이러한 판단을 끌어내기 위해 안 변호사와 유족은 접종자가 갖고 있는 해면상혈관종의 치명적 출혈 발생률이 10% 정도라는 점을 부각했다. 해면상혈관종은 중추신경계 혈관 기형의 하나로, 단일 세포층 형태의 모세혈관의 해면체 모양(벌집) 종괴(덩어리)다. 안 변호사는 “혈관종이 치명적이지 않은 데다 접종자가 기존에 이 기형으로 치료 받거나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부각했다”면서 “그런데도 젊고 건강했던 접종자가 백신 맞고 갑자기 숨진 사정을 질병청이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재판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정부가 인과성 불인정 사유로 내세운 기저질환이 사망을 초래할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은 기형이라면, 건강했던 젊은 남성이 접종 이후 사망한 원인을 정부가 제시해야 ‘사망과 백신 간 관련성이 없다’는 정부 주장이 타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부 측 ‘기저질환’ 논리를 역이용한 셈이다.
안 변호사의 이런 논리는 받아들여져 재판부는 “상당한 임상기간을 거쳐 승인 허가가 이뤄지는 다른 전염병 백신과 달리 코로나19 백신은 예외적 긴급절차에 따라 승인 허가가 이뤄지고 조건부로 승인 허가돼 접종됐다. 구체적 피해 발생 확률이 어떠한지 등은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결국 백신 접종 뒤 이상증상이 발현됐다면 다른 원인에 의해 발현됐다는 점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증명이 없는 한 오 씨의 사망과 백신 접종 사이에 역학적 연관성이 없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백신 기저질환 싸움 이긴 것은 유일무이…유사 재판 ‘줄승소’ 예고
통상 질병청이 백신 접종과 이상반응 간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로 기저질환을 많이 제시하는데, 이번 판결은 ‘기저질환 역공’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한 항소 여부에 대해 질병청은 “현재 진행 중인 사항으로, 입장을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11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이후 뇌질환 진단을 받은 30대 남성이 질병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예방접종 피해보상 신청 거부 처분 취소 소송에서 법원이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하자 질병청은 항소했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취하했다. 이후 질병청은 해당 남성에게 보상이 아닌 지원 정도의 조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재판에서도 접종자의 뇌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촬영 영상에서 발견된 해면상 혈관 기형이 문제가 됐는데, 이 증상이 기저질환으로 제기된 게 아니라 백신 접종 이후 이상반응의 하나로 주장됐다. 하지만 이번 오 씨 사례에서는 반대로 질병청이 해면상 혈관 기형을 기저질환으로 내세웠다. 이에 오 씨 측 변호인은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런 기저질환의 치명성이 낮다는 근거 논리를 제시해 승소에 이른 것이다.
나머지 재판에 이번 승소 판결이 판례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안 변호사는 현재 백신 접종 뒤 이상반응으로 숨지거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대변하는 소송을 10건 정도 진행 중이다. 안 변호사가 맡지 않는 다른 백신 접종자의 정부 상대 소송에도 이번 판결이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안 변호사는 “비슷한 국가 상대 행정소송을 하는 분들은 이번 소송 결과를 참고할 수 있다. 판례가 쌓이면 다른 재판부 판단의 근거가 된다”며 “접종자나 가족은 기저질환의 치명도가 높은지, 접종과 사망 사이에 기간이 짧은지 파악해 이를 인과성 입증 근거로 부각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재판부 “입증 책임 접종자가 안 져도 돼”…‘입증책임 전환’ 법제화 영향?
이번 법원의 판단은 접종자가 접종 이후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을 지지 않고 인과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재판부는 “망자의 사망이라는 결과가 백신 접종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백신 접종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의학 이론이나 경험칙상 불가능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면서 “사망과 접종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어 “접종 이후 이상증상이 발현됐다면, 다른 원인에 의해 이것이 발현됐다는 점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증명이 없는 한 망인의 사망과 이 사건 백신 접종 사이에 역학적 연관성이 없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 사유를 밝혔다. 인과 관계 입증 책임을 접종자에게 지우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고 입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질병청의 그간 행태와 다른 판단을 한 것이다.
법원은 2017년 4월 대법원 판결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당시 법원은 예방접종과 장애 등의 발생 사이에 시간적 밀접성이 있고 피해자가 입은 장애 등이 예방접종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의학이론이나 경험칙상 불가능하지 않으며, 장애 등이 원인불명이거나 예방접종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의 증명이 있으면 인과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고 판시했다.
안 변호사는 “법원이 접종자의 인과관계 입증부담을 완화하고 정부가 입증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며 “이런 부분은 현재 국회에 올라가 있는 코로나19 1백신 피해자 보상 지원을 위한 특별법에도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회에는 백신 접종과 이상반응 간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질병청에 주고, 입증이 안 되면 백신 이상반응을 인정하는 ‘입증 책임 전환’ 내용이 담긴 법안이 제출돼 있다. 접종과 이상반응 간 시간적 밀접성이 높고 이상반응이 일어날 다른 직접적 사유가 없는 경우가 전제로 깔린 법안인데도 질병청이 반대하고 있어서 백신 접종자 지원을 위한 최종 법안에 담기지 못했다. 안 변호사는 “백신 피해를 입증할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접종자가 이런 요건을 다 충족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백신 접종 뒤 며칠 내로 이상반응이 일어나면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쪽으로 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유족 “신뢰 저버린 국가에 허탈…이제야 당연한 귀결”
이번 승소로 가장 힘을 얻은 이는 누구보다 유족이다. 이들은 재판 청구 당시 심정을 전하면서 “정부 믿고 백신을 접종했는데, 남편, 아빠이고, 동생이었던 남성이 하루아침에 가족 곁을 떠났다”면서 “이런 억울한 사정을 재판부가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등정한 용어가 ‘신뢰보호법칙’이다. 재판을 뒤에서 도운 오 씨의 사촌 형은 “접종 당시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백신 접종으로 인한 부작용을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했다. 건강했던 동생이 그 말만 믿고 백신을 접종했다가 고인이 됐다”면서 “그런데, 접종자가 인과성을 밝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치명률도 낮은 기저질환을 내세워 피해 보상을 인정하지 않은 질병청 행태는 신뢰보호법칙에 반해 위법하다고 주장했는데, 재판부가 받아들여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오 씨 사망 뒤 네 살배기 자녀를 홀로 키우고 있는 아내 김 씨는 “남편이 갑자기 떠나고 황망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매일 위패가 모셔져 있는 납골당에 찾아갔다”며 “질병청의 인과성 불인정 결과서를 받고 나서는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많이 울었다. 이제라도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결론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이제 남편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마음속에서 놓아줘야 할 것 같다”며 “우리와 유사한 사례를 가진 많은 분이 이번 판결을 밑거름 삼아 승소 판결 받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백신 피해자 단체들도 이번 승소 사례가 백신 접종자의 포괄적 지원을 위한 법안에 반영될 수 있도록 힘을 내려 한다. 코로나19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코백회) 측은 강기윤(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지영미 질병청장과 면담하기로 했다. 코백회는 지 청장에게 질병청에 백신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고 포괄적으로 피해를 인정하는 법안의 필요성을 재차 전하고 피해자와 정치권 정부 시민단체 전문가가 함께하는 자리의 정례화를 요구할 예정이다. 김두경 코백회장은 “그간 질병청이 피해자와 만날 때마다 듣기 좋은 이야기로만 희망 고문해 왔다”며 “만남과 동시에 질병청의 그간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공개하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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