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소멸은 새 인연의 밑거름…화산재가 옥토 만들 듯

한겨레 2023. 7. 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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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잘 헤어져야 하는 이유
직원 3천명 규모 사업 접으면서
개인면담 뒤 계열사 인력 재배치
사업 철수하며 사람 포기 안해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최근 한 후배를 만났습니다. 그는 입사 이후 17년 동안 줄곧 한 사업본부에서 일했는데, 몇년 전 회사 내 다른 부문에 재배치됐습니다. 그가 일하던 사업본부가 해체됐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에서 일하게 돼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엔 댐을 만드느라 살던 곳이 수몰돼 도시로 내몰린 것 같았어요. 도시에선 덩그러니 혼자 있는 것 같았고요. 새 동네로 이사 오느라 이주금도 많이 받았고, 또 오고 싶었던 곳에 왔는데도 허전해요. 어쩌다 옛 동네 사람을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씁쓸해요. 관계의 소멸이 힘들어요.”

후배가 일하는 회사는 2년 전, 여러해에 걸쳐서 누적된 적자를 해소하고 새로운 사업에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사업본부를 철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사업 매각도 검토했지만 26년간 축적된 기술력과 특허를 회사 내에 보유하려고 사업 철수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무려 7조원이 넘는 큰 사업인데다 직원도 3천명이나 됐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사업 철수였는데 직원과 회사 사이에 갈등이 표출됐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철수된 사업본부에서 일하던 후배 임원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력 재배치 끝내고 본부장 홀연히…

내용은 이랬습니다. 최종적으로 사업 철수가 결정된 뒤 사업본부장인 ㄱ씨는 그룹 내 인력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직원들의 고용을 보장해줄 것을 건의했고 회사는 이를 수용했습니다. 본사 최고경영자는 재배치될 직원들에게 ‘사업 철수 결정은 당신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각자 원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최대한 자리를 찾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후 ㄱ본부장은 임원, 팀장, 관리자 수백명과 개인 면담을 했습니다. 사업 철수 실행 단계에 들어서는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적 친분에 따른 이동은 없으며 △지원 가능한 직무와 지원 현황 등을 빠르고 투명하게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직원들은 희망 부서를 여섯차례나 써냈고 경영진은 직원들이 옮길 자리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4월에 시작된 재배치 작업은 9월에야 끝났습니다.

ㄱ본부장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옮겨간 회사를 수시로 방문해서 격려하고, 직원들의 새로운 상사를 일일이 만나서 전입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부탁했습니다. 새 식구를 맞이한 계열사도 전입자들이 잘 정착하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ㄱ본부장은 임원 4명과 함께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일 제가 다른 자리로 가서 자리를 보전했다면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겁니다. 저의 인사를 청탁하러 다니거나 사리사욕을 부렸으면 이번 사업 철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나라의 녹을 먹은 선비가 해야 할 바를 하듯이 저도 제 밥값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재배치된 후배에게 “가끔 만나게 되는 수몰된 동네 이웃의 마음은 어떨 것 같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할 수 없이 언덕 위로 이사 왔지만 이젠 다시 살아보려는 힘이 느껴져요. 회사가 사람을 돌본 것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에 상처는 있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가 좋은 곳이라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본부장님이 책임지고 회사를 떠난 건 마음 아프지만, 그분이 오셔서 사업을 철수하신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그분이니까 해내신 거예요.”

시장에서 비즈니스는 업다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회사가 생기고 또 사라집니다. 창업 후 356년 동안 머크 가문이 지배하면서 성공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독일의 제약회사 머크는 참으로 특이하다고 할 수 있지요.

회사도 사업도 생명체와 같습니다. 시장이라는 생태계에서 생존하고 또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혁신을 바탕으로 경쟁하며 성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충격으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한 회사 안에서도 모든 사업 부문이 동시에 성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창업하고 성장하는 것, 신사업에 투자하고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포기하고 소멸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사라지는 건 회사나 사업일 뿐, 사람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소멸하면 화산재가 비옥한 농토를 만들듯 새로운 생명 탄생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계열사로 재배치된 그 인원들이 지금은 특히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새 회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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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삶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다양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안에서 일상이 영위됩니다. 노년에 접어들면 새로운 만남은 줄고 헤어짐이 많아집니다. 은퇴 뒤엔 늘 만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주변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마치 세상이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기존 관계의 소멸이 새로운 만남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 중심의 관계에서 사람 중심의 관계로 넘어가는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능력이나 지위보다는 사람 자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노화가 진전될수록 관계는 더 진지해질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남은 시간이 더욱 소중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관계는 더 깊고 따뜻한 관계로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에는 에너지를 쓰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둡니다. 헤어지는 것입니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 73살의 앨빈 스트레이트는 10여년 동안 연락을 끊고 살던 형 라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앨빈은 형을 만나 직접 화해하고 싶지만 퇴행성 고관절염을 앓는데다 운전면허증도 없습니다. 그는 30년 된 낡은 잔디깎이를 트랙터처럼 개조해 길을 떠납니다. 느리고 느린 6주간에 걸친 여정 끝에 결국 그는 형을 만납니다. 이 만남은 어릴 때 같이 앉아 밤하늘의 별들을 함께 바라보던 관계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또 잘 헤어지기 위한 만남입니다.

앨빈은 여정의 중간에 자전거 여행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한명이 질문합니다. “나이 들면 좋은 것도 있죠?” 앨빈이 답합니다. “몸이 말을 안 듣는데 뭐 좋은 일이 있겠나.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돼. 부질없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되지.”

노년엔 부질없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얽매이지 않다 보면 잘 헤어지게 됩니다. 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잘 헤어져야 다음 인연에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움트게 됩니다. 그리고 희망이 만들어집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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