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원리 조선백자 도자 가마터, 도자 고고학의 출발지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2023. 7. 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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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3> 경기 광주시 분원리 가마터
경기 광주시 분원리 B지구 백자가마 오름가마 내부의 모습. 2001 이화여자대학박물관 발굴

광주 분원. 조선 시대 마지막 130년 동안 왕실 도예를 굽던 곳이다. 그리고 관요(官窯)가 폐쇄된 19세기 말 상업 도예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경기 광주 일대는 곳곳에 350개에 달하는 조선 시대 백자 가마의 흔적이 남아 있어 도자 고고학의 중요한 지역 중 하나다. 그리고 많은 가마 중에서도 조선 시대 왕실과 사대부에게 특별히 보석같이 사랑받았던, 백자 시대의 클라이맥스이자 대단원을 장식한 곳이 바로 분원리 가마터다. ‘당대 최대의 공업지대가 바로 이곳 분원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아울러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국 일본 도자기 산업처럼 국부의 원천이 되지 못한 점은 정말 아쉬운 역사다.


분원리 백자 가마 유적지 가는 길

사옹원 분원의 도요지 분포도

수도권에서 분원 유적만큼 나들이에 매력적인 곳은 없을 듯하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데다 팔당 호수의 절경 속에서 조선백자의 가치와 역사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 중부고속도로 경안 톨게이트 바로 옆 상번천리에 조선 초기 분원 가마터가 전시돼 있다. 톨게이트를 나와서 동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역시 초기 관요 터가 있는 도마리(道馬里)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팔당호를 건너면 퇴촌마을이 나오는데 다시 동쪽으로 팔당호 수변을 따라가면 최고의 달항아리를 구워낸 금사리(金沙里)가 나온다. 이곳은 분원리로 옮기기 직전 단계의 백자 가마가 있던 곳이다. 작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분원리가 한강 나루터에 훨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팔당호가 생기면서 분원리 마을은 수몰되고, 언덕 높은 곳 지금의 분원초등학교 자리 일대에서 가마터들이 발굴됐다.

광주 경안 톨게이트 인근에 위치한 번천리 가마 전시관 내부 모습. 연대가 알려진 백자 묘지석이 발견돼 백자편년에 중요하다.

안타까운 유적 보존

분원백자도요지 B지구. 분원초등학교와 상가 입구 사이에 있어 좀처럼 찾기 어렵다.

집들로 둘러싸여 있어 큰길가에 도로표지판이 없으면 유적을 찾기 힘들다. 마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한 분원초등학교 정문으로 향하다 보면, 골목 옆 풀이 무성한 자리에 유적 안내 간판이 서 있다. 2000년대 초에 발굴한 곳인데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비스듬하게 오름가마가 잘 남아 있다. 발굴 당시 아치형으로 남아 있던 가마 천장 안쪽에 엉겨 붙은 유리질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뜨거운 가마 속에 벌겋게 달아오른 백자항아리를 상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후 정비 계획에 따라 학교 위쪽에 널찍한 마당을 가진 작은 전시관이 문을 열었지만, 분원리를 지나는 수많은 관광객의 눈에 띄기에는 너무 깊이 숨어 있다. 우리 조상들의 멋과 삶, 더 나아가 조선 시대 산업까지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인 만큼 좀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찾아와 마음껏 보고 느끼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관요의 마지막 종착지, 분원리

분원리 도요지 가마.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 국립박물관 소장

‘분원(分院)’은 왕의 음식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라는 뜻이다. 궁중에 필요한 그릇을 만들어 공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아마도 조선 초 세조 대에 중국 명나라의 어기소를 본받아서, 1467~1468년간에 본격적으로 왕실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관요로 출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양 궁궐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일대에서 양질의 백토를 구할 수 있는 데다 한강을 통해 재료나 생산품의 운송에 용이하다는 지리적인 이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분원리 도요지 가마 중 연기 배출구 쪽 모습.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 국립박물관 소장

관요는 땔 나무가 고갈되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해야 된다. 그래서 광주에는 약 150년 동안 탄벌리에서 시작된 관요가 금사리까지 이동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땔나무를 한강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해결되면서 1752년 한강 나루에 가까운 오늘날 분원리에 관요가 항구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883년 민영화되어 1910년 폐요될 때까지 지속된다. 아마도 백토의 공급 역시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양질의 백토는 양구나 경주 등지에서 공급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많은 양을 생산했다는 양구의 경우에 1년에 8톤 트럭 20대분이 공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경우 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북한강과 남한강 수운이 두물머리에서 합쳐져 내려오는 분원리 일대가 운송에 가장 유리한 여건을 갖췄을 것이다. 땔나무나 백토가 도달할 때면 파시(波市)처럼 붐볐을 나루 마을이 상상된다.


분원리 옛사람들

분원리 B지구에 있는 오름가마 불창 기둥과 받침이 노출된 모습. 200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발굴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문 도공인 사기장 1,000여 명을 선발하여 380명씩 3교대로 차출, 동절기를 제외하고 장기간 관요에 머물면서 작업하도록 하였다. 분원에는 도공을 관할하는 사옹원 관리들이 상주하고, 그 아래 도자기 공정마다 전담 도공들이 담당하게 된다. 또 때때로 왕실에 들어갈 도자기에 청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화서 화공들이 한양에서 온다. 전시관 앞마당의 비석들이 당시 사옹원 관리들의 업적을 기념한 것들이다. 도제조는 대체로 재상이나 왕실 종친이 담당하였다는 것을 보면 왕실의 직할 기관으로서 그 권위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국가의 공납체제 속에서 백자를 만드는 데 참여한 도공의 어려움, 그리고 각 지역 백토의 채굴이나 운반 과정에서의 괴로움이 크다는 것도 기록에 남아 있다. 분원에 끌려오기 싫어 군대에 가는 도공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이경직(1577~1640·도쿠가와 막부 파견 사절단 종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을 데려오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는데 오히려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고된 작업이었음을 반증한다.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하얀 바탕에 푸른 그림의 청화백자에는 예술혼을 떠받친 인간의 욕망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력도 함께 숨어 있는 셈이다.


분원리 가마, 조선 청화백자의 극성기이자 종말

청화안료로 용과 구름을 그려 넣은 용준(龍樽) 항아리. 높이 57.5 cm의 대형 백자 항아리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무한한 깊이를 담은 조선백자는 성리학의 이념과도 통하는 점이 있지만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세조가 세자의 그릇에 백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도 엿볼 수 있다. 조선 초기부터 명나라의 청화백자에 자극되어 이를 자체 생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청화 안료의 수입이 문제였다. 한반도에는 극히 귀한 안료로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값이 금보다도 높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인데, 가장 오래된 것은 세조 빙모(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의 묘지에서 발견됐다. 당시 성리학적 이상으로서 군자를 상징하는 매ㆍ난ㆍ국ㆍ죽 등의 식물들을 당대 최고 화원을 동원하여 그린, 도식적인 중국풍과는 다른 자연미가 배어나는 작품들이어서 조선풍이 초기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귀한 안료 때문에 원래도 많지 않았던 청화백자는 두 전쟁, 즉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더욱 생산이 어렵게 되었고 대신 철화백자가 더욱 번성하게 된다.

구름용무늬 필통과 연적.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 백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분원이 금사리로 이설된 1721년경부터 다시 청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도 청화안료는 귀했기에 대단히 절제되어 사용되었는데, 여백이 많고 절제되고 정갈한 그림들로 채워져 조선 청화백자의 독특한 미감이 드러나게 된다. 이후 청화백자는 크게 번성하여 다양한 기형들이 나타나고, 그 표면에 다양한 소재를 농담을 이용하여 원근법을 표현할 수도 있어서 그림들이 훨씬 사실감 있게 된다. 청화백자가 이 단계에서 크게 번성하는 것은 안료가 풍부해지고 또한 사번(私燔), 즉 도공들의 생계유지를 위해서 왕실 이외의 민간수요를 위한 생산이 허용되면서 다양한 수요를 수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청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으로 그림이 도식화되거나 또는 동일한 모양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양식적 퇴행이 보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왕실에서도 중국이나 일본제 자기를 선호하게 되고 사대부층이 따르게 되면서 결국 분원리도요지는 후원자를 잃게 되고 민영화된 후, 곧 문을 닫게 된다.

수복강녕 난초문 항아리. 당시 매우 귀했던 청화안료를 사용해 제작한 백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마리산(産) 일본 도자가 주는 교훈

도자기 전쟁이라고 일컬을 만큼 임진왜란 동안 많은 도공들이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도자산업은 크게 위축되었지만, 일본에서는 도신(陶神)이라고 일컫는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ㆍ?~1656)이 도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산업으로 발전한다.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중국의 채색 도자 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혁신품인 이로에(色繪) 자기를 만들어냈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이마리항을 통해 수출됐다. 이마리야키(伊萬里燒)라고 불리는 이 수출용 도자기들이 일본 근대화의 재정적 바탕이 되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과 일본 도자 산업의 서로 다른 결과는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준다. 세계화 시대에 기술과 창의성 그리고 지도자의 미래 비전과 경영능력이 얼마나 사회발전의 핵심적 자산인가. 도자 전시관 앞의 너른 잔디마당에서 팔당호를 내려다보며 짧은 생각을 해 본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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