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의견] 분석의 밀도와 당도
[미디어오늘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학생들과 (정규 수업 외에) 이런저런 공부 동아리 활동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저책이책'이다. '저널리즘 책을 읽는 이들의 책방'을 줄인 말이다. 국내외 기자가 쓴 책을 학생들이 골라 오면, 게으른 나도 책을 읽는다. 최근엔 미국 기자 폴 로버츠(Paul Roberts)가 2008년 펴낸 <식량의 종말>을 읽었다. 언론 관련 도서가 병풍을 이룬, 학교의 책방 '단비 서재'에서 작은 토론이 열렸다. 어느 학생이 말했다. “기자라서 쓸 수 있는 책인 것 같아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은 500여 쪽이다. 역사, 의학, 과학, 경제, 정치를 넘나들며 지구적 식량 위기를 다뤘다. 각 분야의 최신 연구·자료·통계를 아울렀고, 세계 곳곳의 농업, 제조업, 유통업 현장을 찾아 당사자와 전문가를 만났다. 이런 글 또는 책의 밀도는 높다. 정보가 너무 촘촘하여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당도 또한 높다. 사람, 현장, 그리고 이야기가 있어 읽는 맛이 달다. 맛을 보면, 암만 두꺼워도 끝까지 읽게 된다.
역사학자는 식량 역사를 다룬 책을 쓰고, 경제학자는 식량 경제를 다룬 책을 쓰겠지만, 식량의 여러 분야를 종횡으로 이으면서 생생한 현장까지 담는 글은 오직 기자만 쓸 수 있다. 여러 변수가 관련된 복잡한 이슈를 친근하게 설명할 적임자는 기자다. 이 책은 기자의 그런 역량과 권능을 입증한다.
그러니 '기자라서 쓸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인데, 그 품평을 비틀어 질문할 수 있다. 한국의 기자는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그 대답의 긍정과 부정을 가르는 경계에 '분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글에서 '기자는 칼럼 쓰지 말고, 분석·해석·설명하여 맥락을 제공하는 기사를 쓰자'고 적었는데, 맥락적 보도로 향하는 일차 엔진이 바로 분석이다.
분석은 한자 뜻 그대로 대상 전체를 나누고(分) 갈라서(析) 각 요소를 일일이 살펴본다는 뜻이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analysis의 어원에도 '관통하다'(ana)라는 뜻과 '느슨하게 풀다'(lyein)라는 뜻이 있다. 지구적 식량 문제를 관통하는 모든 요소를 풀고 나눠 각 쟁점을 섭렵하는 게 분석이다. 여러 요소를 충분히 다루면 분석의 밀도가 높아진다. 여러 요소를 흥미롭게 전달하면 분석의 당도가 높아진다. 반면, 요소를 구분하지 않고 덩어리로 뭉치거나, 하나의 요소로 모든 걸 설명하면 묽고 밍밍한 기사가 된다.
학생들과 함께 읽은 책 가운데 밀도와 당도가 높은 것으로 영국 기자 애덤 히긴보덤(Adam Higginbotham)이 펴낸 <그날 밤 체르노빌>도 있다. 역사, 정치, 경제, 과학을 넘나든 이 책의 번역본은 700여 쪽에 이른다. '저자의 기사 중 다수는 영화나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계약이 체결돼 있다'고 속 표지에 적혀 있다. 이 책이 발간된 2019년, HBO와 왓챠에 연작 논픽션 드라마 <체르노빌>이 방영됐다. 좋은 분석 기사를 축적하면, 단행본은 물론 다큐·드라마·영화로 이어져 더 많은 사람에게 사실과 진실을 전할 수 있다. 분석의 역량만 있다면 OTT 시대에도 기자는 잘 살 수 있다. 칼럼을 아무리 모아봐야 그렇게 못한다.
기자의 분석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슈는 너무 많다. 예를 들어, 학부모의 괴롭힘으로 젊은 교사가 목숨을 끊었다는 정보만 담으면 단편·단발 기사에 그친다. 좋은 기자라면 이면의 구조를 드러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개탄하는 칼럼을 쓰는 것은 게으른 기자의 일이다. 그런 글은 소셜미디어에 이미 차고 넘친다. 기껏해야 사건을 뭉뚱그린 밍밍한 의견이나 밝히게 될 것이다.
그러지 말고, 당사자와 관련자를 만나 기초 사실을 확인하고, 과거와 해외의 유사 사례, 관련 법령과 제도, 통계와 보고서를 수집해 일일이 살펴보는 분석 기사를 쓰면 좋을 것이다. 뭉치지 않고 분해하는 사람, 덩어리의 세상에서 개별을 추려내는 사람, 구체를 파악하여 전체를 새롭게 종합하는 사람이 기자다. 그의 일이 저널리즘이고, 그 일에 꼭 필요한 도구가 분석인데, 이를 잘 다루는 기자가 한국에는 드물다. 분석 이전의 단신 보도에 머물거나, 분석을 생략하고 의견으로 넘어가는 기자가 더 많다. 인공지능과 논객에게 각각 대체될 일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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