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된 빛나는 성취…‘비로소 진실’ 뒤 얻게 된 것
비밀의 언덕
거짓말로 자기세계 구축한 초5
‘진솔한 글’ 친구한테 자극받아
가족 상처받을까 글쓰기상 포기
‘거짓말 언덕’ 넘으며 사는 일상
때는 1996년. 초등학생 명은(문승아)은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부모가 부끄럽다. 그래서 5학년 학기 초 친구들이 다 같이 있는 교실에서 공개적인 가정조사 면담을 하던 중 그만 담임(임선우)에게 아버지는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가정주부라고 거짓말을 한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공개적인 가정조사를 피하기 위해 명은은 정성스럽게 고른 선물과 함께 담임에게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일대일 면담을 하면 좋겠다고 편지까지 썼다. 하지만 조사 당일 지각한 담임은 명은의 편지를 읽지 못한 채 서둘러 공개 면담을 이어간다. 친구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명은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전날부터 ‘제일 좋은 꽃 리본’을 단 선물을 준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명은은 설렁설렁 사는 사람이 아니다. 가슴속에 야망을 품고 큰 그림을 그려 그걸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는, 아이가 아닌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는 세련되고 교양 있게 살고 싶다. 그런 그가 부모를 견딜 수 없는 건 직업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 ‘젓갈’이란 돈 한푼에 절절매는 부모의 ‘속물근성’ 그 자체인 것이다. ‘불우이웃’을 돕자는 명은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부모의 얼굴이야말로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다.
진실의 힘 깨닫고
명은은 새 학기를 맞아 반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야심차게 ‘비밀 우체통’ 공약을 내걸어 판세를 뒤집고 반장이 된다. 하지만 감투나 명예에 관심이 없는 엄마(장선)는 그 소식을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먹고사는 것도 팍팍한 마당에 반장 엄마 노릇까지 할 수는 없다며 그만두라고 윽박지른다. 그렇다고 물러설 명은이 아니다. 이제 명은은 안팎으로 거짓말을 해야 한다. 집에선 반장이 아닌 척하고, 학교에선 엄마가 학부모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둘러댄다. 그리고 쌓여가는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자기가 만든 세계를 지켜나간다.
학기가 지나면서 명은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 찾아온다.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교내 글짓기 대회다. ‘환경 보호’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명은은 수많은 책을 읽고 꼼꼼하게 공부한다. 그는 애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이야기’ ‘남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잘 풀어서 상을 받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글감에 대해 익힌 뒤 그 내용을 한땀 한땀 글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명은은 분리수거의 필요성에 동의하게 되고 환경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글쓰기의 동력이 오로지 인정욕구만은 아닌 셈이다. 그는 재능이 특출나진 않지만 성실하게 작업하는 작가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지난한 노력과 다소간의 진정성이 버무려져 있었으므로, 글 작업에는 우수상이라는 꽤 괜찮은 성과가 따라온다.
그러던 어느 날, 승승장구하던 명은의 행보에 브레이크를 거는 존재가 나타난다. 전학생 혜진(장재희)이다. 혜진은 ‘평화’를 주제로 한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명은의 앞을 가로막는다. 이전에도 거짓말이 탄로 날 뻔하고 가출을 하는 등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명은에겐 혜진이야말로 ‘진정한 위기’다. 그건 단순히 혜진이 글을 잘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쓰는 사람이고, 감추기가 아닌 드러내기를 글쓰기의 전략으로 삼는 작가다. 그런 혜진은 명은의 존재론을 뿌리부터 흔들어놓는다.
전학 온 첫날 “아빠는 없고 엄마는 아가씨 골목에서 장사를 한다”는 말로 가정사를 털어놓으면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혜진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다. 글 한편을 쓰기 위해 몇날 며칠을 읽고,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쓰고 지우는 명은과 달리, 한두시간이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진솔한 글을 써내어 심사하는 어른들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어놓는 이의 등장. 혜진의 전략을 배우면서 명은은 ‘가족’을 주제로 하는성원시 글짓기 공모전에 거짓이 아닌 진심을 담은 글을 투고한다. 부모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할아버지, 삼촌, 오빠에 대한 마음까지, 그동안 숨겨왔던 ‘진짜 이야기’가 원고지 위에 펼쳐진다. 그리고 결과는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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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지만 가짜라고 할 수 없는
하지만 수상작이 성원시 신문에 공개된다는 걸 알게 된 명은은 갈등한다. 이 모든 생각이 가족들에게 투명하게 전해진다면, 그들은 어떤 상처를 받게 될까. 심지어 내가 가족에 대해 알던 것과 사실이 다르다면?또다시 몇날 며칠을 고민한 명은은 결국 투고를 철회하고 (그토록 원했던) 최우수상을 포기한다. 그리고 성원시청에 보냈던 원고를 되찾아 동네 뒷산 언덕에 올라 땅에 조심스럽게 묻는다. 비로소 특별한 비밀이 탄생한다.
영화는 비밀이란 거짓말의 결과라기보다는 진실과 대면한 이후에 등장하는 소중한 무엇이라고 말한다. 명은은 가족에 대한 솔직한 글쓰기를 통해 가족과 제대로 대면한다. 그가 가족을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정’하게 되는 건 그 덕분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거짓말의 언덕’이 아니라 ‘비밀의 언덕’이다. 명은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잘 가꿀 줄 알면서도 상황에 따라 때로는 타협할 줄도 아는 사람으로 한 단계 올라서게 만드는 건, 나를 빛나게 할 성취를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비밀을 만드는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까닭이 있다. 명은뿐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한다. 교장은 학교를 잘 운영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하고, 담임은 소소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지 않는다. 여유 있는 집 가정주부는 우울을 숨기며 웃고, 아내의 생활력에 기대어 살아가는 남편은 무능을 감추기 위해 호기롭게 큰 소리를 낸다. 삼촌은 조카를 위해 필요도 없는 먼지 낀 가방을 닦아 메고, 아들은 삶에 지친 엄마를 위해 짜증을 참는다. 어느 누구도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일상적인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차리기조차 어렵다. 비밀일 것까지도 없는 작은 꾸밈들. 거짓이지만 가짜라고는 할 수 없는 행동들. 그러므로 영화의 숨은 제목은 ‘거짓말의 언덕’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비밀 하나를 가지게 되기까지, 우리는 누구나 거짓말의 언덕을 넘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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