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단독] 김종인 "대선 때 윤석열 후보 돕게 된 계기는 윤 후보 부인의 전화였다"

윤춘호(논설위원) 2023. 7. 2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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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메이커' 김종인 "모든 것은 국민에게 달렸어요"

✏️ 그 사람 '김종인 편' 맛뵈기

·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돕게 됐던 계기는 윤 후보 부인 김건희 여사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고.

· "그 사람(윤석열)이 정치 참여 선언할 때도 관심 안 가졌었는데 한참 있다가 그 부인이 나한테 '자기 남편 좀 만나달라'고 전화를 했다"며 "본인(윤석열)에게도 만나자고 연락이 와 그 부부를 만났다"고.

· "그동안 한 일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 같아서 당내 경선 과정에서 많이 도와준 것"이라면서 그러나 정작 윤석열 본인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직후부터 태도가 확 바뀌었다고 회고.

·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당시 여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총선,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것과 관련,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측 핵심인사들과 기싸움을 세게 벌이기도 했다고 털어 놔.

· '그 사람'- 김종인 편 영상 최초공개, 7월 22일 오후 4시 30분 SBS뉴스 유튜브채널


이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

지난 6월 하순 한 모임에서 이 사람 강연을 들었다. 주최 단체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말 '이 단체와 어떤 인연이 있고 누구와 아는 사이고 어쩌고' 하는 말은 일절 없었다. 연단에 오르자마자 "현재 우리나라 정치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으로 시작해서 메모 한 장 없이 90분 강연을 이어갔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다. 그 실용적인 태도가 기억에 남았고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몇 사람에게 여러 번 이 사람을 만나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렇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우선 이 당 저 당 바꿔가면서 상왕 노릇을 하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을 아는 이들은 남다른 능력을 가진 '경세가'라고 했지만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물으면 딱히 시원한 답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2012년 이후 빈사 상태에 빠진 두 거대 정당을 극적으로 살려내고 박근혜, 문재인 정권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오롯이 이 사람만의 공인가 싶었고 저런 정도의 '상식적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비대위원장 시절 보여준 다소 오만하고 독선적인 행태에서도 거부감을 느낀 게 사실이다. 선거 때만 되면 '비대위원장 김종인'에게 매달리는 두 거대 정당이 한심해 보였고 이 사람의 존재와 역할이 부각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달 초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자를 보냈다. '이런 취지의 글을 어디에 연재하고 있다. 한 번 뵙고 말씀을 듣고 싶다'는 문자였다. 깐깐하다고 소문난 사람이니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꽤 번거로운 과정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 모임에서 얼굴을 스치듯 보기 전까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답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자를 보내고 30분쯤 지나서 몇 월 며칠 몇 시 광화문 자기 사무실로 오라며 사무실 주소가 적힌 답 문자가 왔다. 당신은 누구냐, 인터뷰는 얼마나 하느냐, 어디에 실리느냐, 무엇을 물어볼 거냐 등등 있을 법한 질문은 없었다. 지금까지 70여 명 인터뷰를 했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지난 7월 14일 오후 광화문에 있는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사무실에서 이 사람을 만났다. 1940년생, 며칠 전 생일이 지나 이제 83살이 되었다고 했다.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맸고 자세가 꼿꼿했는데 무엇보다 얼굴색이 좋았다. 대화는 쉬는 시간 없이 세 시간 정도 이어졌는데 나이 듦이 퇴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우선 말해두기로 하자.

비례대표로만 5선 의원, '경제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킹이 되지 못한 킹 메이커' '여의도 차르'라고도 불린다.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의 손자, 박정희 정권에서 의료보험과 재형저축의 아이디어와 이론을 제시했다. 노태우 정부 청와대 경제 수석으로 재벌들의 비업무용 토지 매각 등 강도 높은 재벌 개혁 조치를 주도했다.

5공 정권에서 두 번이나 전국구 의원을 하고 6공에서 장관과 수석을 한 이력을 보고 집안 좋고 재주도 좋고 처세술까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유능하고 개혁적인 경제 관료 이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동화은행에서 억대의 뇌물을 받아 구속된 지울 수 없는 흠도 있다. 이 사건으로 1994년 국회를 떠난 이후 이 사람의 존재는 잊혀지는 듯했다.

나이 일흔을 훌쩍 넘긴 2012년 박근혜 비대위에 참여했다. '경제 민주화'를 당의 정강정책과 공약으로 내세워 총선과 대선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김종인 매직'의 시작이었고 사라진 줄 알았던 '김종인'의 부활이었다.

2016년에는 민주당 비대위를 이끌어 총선에서 1당에 올려놨고, 2020년엔 다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침몰 직전의 당을 극적으로 살려내며 '경세가'라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찾으려면 역사의 시계를 꽤 뒤로 돌려야 한다.
 

저항이 아닌 협력을 선택하다

1972년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개발도상국에서 분배 및 재분배 정책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8년 만에 귀국해 서강대 교수로 부임했다. 유신이 선포된 직후였다. 귀국할 무렵 지도교수가 그런 나라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만큼 한국 사정은 암울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야당 지도자인 조부를 닮았으니 몸 안에 저항과 반골의 피가 흐를 터였고 20대 시절 조부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야당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재야, 야당과 손잡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설 수 있었고 그런 권유도 적지 않았다.


"내가 왜 저항을 하지 않고 협력을 했느냐? 실질적으로 나라 발전을 위해서 저항만 한다는 것이 나라 발전에 기여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를 정상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느냐…내가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 것이 뭐냐 하면 국가 재정, 국가의 사회 정책, 분배 이런 건데 그런 걸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내가 쉽게 정부 정책에 관여를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던 거예요"

청와대의 요청으로 서울대 교수 조순, 김치선 등과 함께 '금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부가가치세 도입 등과 관련해 박정희 정부에 정책 조언을 했고 의료 보험과 재형저축의 도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못지않게 '정책'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는 일도 중요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5공은 집권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통치 과정 역시 불의한 정권이었다. 그런 정권에 참여한 것은 시행 3년째를 맞는 '부가가치세 폐지를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변명이든 해명이든 장황하지도 구구하지도 않다. 독재 정권에 부역한다는 비난을 많이 들었을 테고 그 때문에 고뇌했을 텐데 그런 티는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는다. 변명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인지 애매하다.

- 5공 참여를 후회하고 반성한다라는 표현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서 보면 '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거기를 갔던 거고, 내가 거기서 뭘 얻으려고 한 게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정말로 후회하고 반성하시는 건지 아니면 일종의 정치적인 수사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애매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내가 광주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모르고 국보위에 갔었던 상황이었는데 사실은 내가 그 당시에도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보는 것은 5.18로 인명 피해를 너무 많이 해서 정권을 잡은 거다…그렇게 큰 인명 피해를 냈으면 그거를 전두환 대통령이 자기 임기 동안에 어떤 형태로든지 해소를 해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간 거지. 그거에 대해서는 사과를 할 수밖에 없는 거지…처음에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간 건데 그게 나중에 자꾸 하나하나씩 다 늘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처리를 못 했으니까 그거에 대한 반성을 해야지."


지난 2020년 한 여름, 5월 광주 영령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손이 떨리고 목이 메었다.
"부끄럽고 부끄럽고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벌써 100번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그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 2020년 8월 19일 광주 5.18 묘역 참배

보수정당 당수 자격으로 지난 정권의 잘못을 대신 무릎 꿇고 사과한 것이지만 자신의 5공 참여에 대한 마음의 빚도 덜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손을 떨고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 대목만큼은 이 노회한 정치인의 속내를 읽기가 쉽지 않았다.
 

고난의 서사를 말하지 않는 사람


지난 60년 동안 만나고 교유해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권력자, 유명인사들이다. 그런데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도 직함을 붙이지 않고 이름 석 자로 부른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실명을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내 기록에 이름 석 자 기록해 둘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보수의 본류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이 곧 대한민국이고 자신들이 아니면 대한민국이 무너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 어지간한 정치인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마름이나 운 좋게 돈 좀 번 졸부로 여기며 눈 아래로 내려보는 사람들, 때로는 대통령도 5년짜리 권력에 불과하다며 업신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도 이 사람 앞에서 큰 소리 내지 못한다.

명문가라는 이름에 값 할 수 있는 집안이다. 조부 김병로는 일제 통치의 오점에서 벗어난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고 대한민국 사법부의 초석을 놓은 존경받는 법률가였다. 이승만 독재에 맞섰고 지금 야당의 뿌리가 되는 한민당의 창당준비위원장이었다. 친가로나 처가로나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은 '업자' 수준으로 보고, 한 자리 줄 테니 내 밑으로 오라는 이야기는 코웃음을 친다.

허튼소리 길게 하지 않고 허튼소리 길게 듣지 않는다. 은근히 사람 주눅 들게 하는 태도 때문일까, 자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대통령 노태우조차도 경제수석 김종인을 어렵게 대했다. 청와대 수석으로 발탁한 노태우를 주군으로 여기냐고 물어보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박근혜, 문재인은 숫제 아랫사람 대하는 태도다. 윤석열도 예외가 아니다.


- 제가 자료를 보면서 생각했던 게 '이 양반은 귀족주의자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귀족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나는 그렇게 사람 접촉을 잘하지 않아요. 솔직히 얘기해서 내가 누구한테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하는 얘기를 잘 안 해. 내가 사람을 무시한다 하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제 그런 얘기를 하는 건데 어떻게 대한민국에 귀족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지금 대한민국처럼 완전히 평준화된 나라가 없는데"

이 사람에겐 고난의 서사가 없다. 고난의 서사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다. 없는 고난의 서사도 만들려는 게 정치인들인데 이 사람은 이 점에서도 예외다.

"사실은 어려서부터 우리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내가 그렇게 크게 특별하게 무슨 호의호식은 안 했지만 고생을 한 적은 없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내가 대학 시험에 한 번 실패한 거 이외에는 별로 실패한 게 없어요."

- 1988년 선거에서 한 번 안 됐잖아요.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니까.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선거를 한 건데 뭐. 그분이 집중적으로 이해찬이 선거 운동을 하는 바람에 이겨낼 수가 없었던 거지"

YS 때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YS의 정치 보복이라고 항변했지만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1994년 의원직을 잃었다. 그때 이후로 2004년까지 10여 년 동안 공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때가 55세에서 65세,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다. DJ 정부에서는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노무현 정부에서는 총리 후보로 여러 번 거론되었지만 매번 불발되었다.

- 그 10년이 힘들진 않으셨어요? 뜻을 못 펴는 그런 아픔 같은 것이 없었을까요?

"별로. 보고 싶은 책도 보고 독일에도 두 차례 연수를 가서 연구소도 쫓아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했기 때문에 그 기간이 오히려 나를 더 성숙하게 한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재벌에 밀리지도 않고 재벌에 손 벌리지 않은 경제수석

1991년 8월 당시 김종인(오른쪽) 청와대 경제수석이 농촌진흥청 제주시험장을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한우의 품종개량 연구과정을 둘러보고 있다. 출처 : 연합뉴스

노태우와는 12대 국회에서 처음 만나 그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보사부장관 재직 중이던 1990년 청와대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이 '당신 내 옆으로 와' 그러더라고. 경제 수석으로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제가 일주일 내로 서면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거를 구분해서 드릴 테니까 그거를 보시고 그래도 필요하시다고 생각하면 내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합니다. 그리고 경제부총리와 재무장관을 저와 호흡이 맞는 사람으로 바꿔 주십시오' 그랬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건방진 거지. 대통령이 장관 하는 놈 보고 오라면은 오는 거고 가라면 가는 거지. 나는 솔직히 얘기해서 여태까지 누구한테 무슨 자리를 놓고 구걸을 해본 적이 없어요"

재벌에게 밀리지 않고 재벌에게 손 벌리지 않는 드문 경제수석이란 평을 들었다. 재벌에 의지해서 성장을 이루려던 생각을 버리고 재벌에게 호통을 치고 재벌이 경제에 입김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재벌들의 비업무용 땅 수천만 평을 팔게 했고 고속철도, 인천공항, 수도권 외곽 순환도로의 밑그림을 그렸다.

- 사실은 경제 수석이 재벌들의 팔을 비튼 것 아닌가요?

"내가 팔을 비튼 것은 아니고 나는 원칙대로 다룬 거죠. 원칙대로. 금융 세제를 동원해도 효과가 안 나면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정책의 기본이에요".

1990년 8월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 연합뉴스


역대 정권들이 거의 예외 없이 성장 만능주의에 빠져 재벌에게 의지하고 그러면서 재벌의 힘은 더욱 커져왔다는 지적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정권이 대기업을 상대하는 이유는 그게 쉽고 편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이 사람 아니면 듣기 어려운 말이다.

회고록에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는 인물이 두 사람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정주영이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천박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듯하다.

"내가 뭐 정주영 씨에 대해서 혹평하는 게 아니에요. 정주영 씨는 기업가로서는 정열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이제 본인이 욕심이 많아 가지고 이제 그러니까 그런 거는 내가 제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죠."

- 정주영 씨가 나중에 정치를 한 이유가 김종인 때문이라는 얘기 들으셨습니까.

"정주영 씨는 사실은 본인이 대통령이야. 모든 관료를 자기가 마음대로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내가 그게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협박도 하시고 회유도 해보고 뭐 여러 가지를 하다가 마지막에 '내가 정치를 해서 저 놈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최고 권력자와의 기싸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대위원장을 맡아 원내 1당으로 세우고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지만 본인에게는 회한만 남는 일이다. 이 사람에게는 거듭되는 배신의 과정이었고 토사구팽 당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두 거대 정당에서 일할 때도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고 헤어지는 과정은 예외 없이 파국에 가까웠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애쓰셨습니다'라는 말이 아닌, '잘 가세요, 다시는 안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말을 들었다. 이 사람 역시 '나도 다시는 당신들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날 선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여·야를 넘나들며 킹메이커 역할을 하던 이야기는 굳이 여기에 길게 적지 않는다. 정작 궁금했던 것은 이 사람이 최고 권력자들, 최고 권력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박근혜와 있었던 일화다.


"2012년 11월 11일 그날이 일요일이야. 나는 그전까지 박근혜라는 사람을 배석자 두고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근데 그날은 갔더니 본인을 빼고 9명을 대동하고 왔어. 대표, 사무총장, 뭐 선대위 본부장, 상황실장, 정책위의장, 대변인, 비서실장, 그다음에 자기 경제 도와주는 강석훈, 안종범. 다짜고짜 김무성 씨가 날 보고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 법안 관련) 로비를 받은 증거를 대라는 거야. 상황실장인 권영세도 똑같은 얘기를 해. 그래 내가 그랬어요.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 누가 와서 얘기를 했으니까 그걸 한다 했을 거 아니냐"

- 그걸 대놓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거를 왜 따지려고 그러느냐. 그리고 내가 여기서 분명히 얘기하는데, 박근혜 후보한테 내가 분명히 얘기를 하는데 내가 여기에서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당신 밑에서 무슨 한 자리에 하고 싶어 와서 하는 줄 아느냐 말이야. 당신이 도와달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거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경제민주화를 싹 지금서부터 지워버려라 이거야.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냥 좀 당황해 가지고 우락부락 한 5분 있다더니 일어나서 나가버렸어요."

내가 당신에게 아쉬울 게 없다, 내가 당신을 돕는 것은 내 개인적 안위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부탁하니, 당신을 돕는 게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배짱이 맞지 않으면 난 언제든지 털고 일어선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아쉬운 사람들이 옷소매를 잡고 매달린다. 박근혜는 다시 이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렸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다시는 찾지 않았다.


- 박근혜 전 대통령도 굉장히 서운해서 취임 후 얼굴을 안 본 거 아닐까요?

"왜 뭐가 서운해?"

- 좀 도와준 것은 맞는데 자기 속을 많이 썩이셨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 속을 썩인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뭘 속을 썩인 거예요? 내 도움만 줬지. 내가 뭐 속 썩인 게 뭐가 있어"

- 이건 농담입니다마는 협박을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일을 하려면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정치권이라는 게 자기네들 약점을 나도 이용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일을 진척을 지속할 수가 없어요."

문재인, 윤석열과도 이런 방식으로 일하고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했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치열하게 싸웠을까. 매번 사람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박근혜를 도와줬는데 왜 문재인 쪽에 민주당을 도와줬느냐 그게 일반 사람들 보기에는 납득이 안 갈 거예요"


2016년 민주당, 2020년 다시 국민의힘을 도운 이야기를 길게 한 뒤에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무슨 자리가 탐나서 내가 그 사람들이 정권 잡으면 거기 가서 내가 한 자리하려고 간 거 아니에요. 내가 박근혜를 도와줬을 때 나이가 74세, 민주당 가서 했을 때는 77세야. 내가 국민의힘을 가서 도와줄 적에는 81살이에요. 내가 그 나이에 그 사람들 밑에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내가 무슨 기회주의적으로 왔다 갔다 한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나는 나대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했던 거예요"


최고 권력자를 잡으려고 했고 거의 잡은 듯도 했지만 최고 권력자가 된 사람들은 이 사람 손아귀 안에 있기를 거부했다. 그것이 권력의 생리였다.

별다른 직책을 갖지 않은 채 중국 현대화를 이끈 등소평을 '신비로운'이라는 형용사를 써 묘사한 적 있다. 당신이 꿈꾼 게 등소평 같은 역할 아니냐고 물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은 자기가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내가 유일하게 건강을 위해 하는 게 지나간 일을 자꾸 곱씹지 않는 거예요. 잃어버리는 거지. 지난 일을 자꾸 생각하면 괴로워서 안 돼."

- 그런데 지나간 일들을 거의 날짜까지 다 기억을 하시나요?

"날짜는 그건 내 기억력이 그걸 기억해 주는 거고. 내가 솔직하게 얘기해서 누구 돕다가 토사구팽 당했다고 자꾸 생각하면 신경 쇠약 걸려서 못 살아요.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 버린 거지."

- 그걸 크게 마음에 안 담아두시면?

"그 인간이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면 방법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윤석열과의 만남과 헤어짐


윤석열은 19대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선대위 해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면서 이 사람과의 결별을 택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후보는 연기만 하면 된다'는 이 사람 발언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갈등은 그 이전부터 내연하고 있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윤춘호(논설위원) 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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