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소를 대라” ... 시민들도 군인들도 분노했다, 무슨 내용 담겼길래 [나쁜 책]
[금서기행, 나쁜 책-2] 이문열 소설 ‘필론의 돼지’
군인들이 분노한 이유는 이 작가가 당시 발표했던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화를 낸 건 군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광주 시민도 같은 소설을 읽고 극대노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제5공화국)이 7년간 판매 금지 도서로 지정했고,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도 불쾌하게 여겼던 이문열 단편소설 ‘필론의 돼지’ 이야기입니다.
‘필론의 돼지’는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43년입니다. 이 책은 왜 논란이었을까요.
‘그는 원래 되도록 군용열차는 피하려고 했었다. 지난 삼 년의 병영생활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주인공 ‘그’는 서울에서 3년 군 복무를 마치고 용산역 출발 대구행 군용 열차에 탔습니다. 전날 친구들에게 거하게 술을 산 까닭에 차비가 부족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군용열차 전역병 전용칸에 몸을 실었습니다.
동전 몇 개를 내주면 “우리를 거지로 아느냐”며 욕설이 돌아옵니다. “돈을 줄 이유가 없다”고 맞서면 주먹이 내리꽂힙니다.
‘백골섬’에서 근무한 특수부대 전역병이 호기롭게 저항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습니다. “군법회의에 당신들(베레모)을 걸겠다”고 따져 묻던 창백한 전역병도 너무 많이 맞아서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헌병도 공안원도 보이지 않습니다. 법과 진리는 언제나 주먹보다 늦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야, 이 답답한 친구들아, 삼년간 당한 것도 분한데 오늘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여! 우리는 백명이란 말여. 그런데 다섯명한테 당해서야 쓰것어?” (115쪽)
그 목소리에 설득당한 전역병들 눈빛이 달라집니다. 전역병들이 베레모 5명에게 달려듭니다. 그런데 정도가 심했습니다. 베레모들 손발이 짓밟혔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급기야 소주병이 깨지더니 여기저기 피까지 튑니다.
보다 못한 주인공이 살기등등해진 전역병들을 만류할지 말지를 고민합니다. 주인공은 무사히 그리운 집까지 갈 수 있을까요.
우선 전역병이 탑승한 군용열차는 박정희 정권 18년 집권이 종료된 직후의 세계를 뜻합니다.
‘필론의 돼지’가 처음 발표된 날짜는 1980년 4월 30일. 직전 해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그해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필론의 돼지’는 이때부터 꽤 복잡한 소설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출판사가 이문열 작가에게 “공수부대가 쫓아가니 몸을 피하라”는 다급한 전화를 걸었던 건 이 때문이었죠. 이문열 작가가 “내가 이 소설을 쓸 때 광주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라고 항변해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작았습니다.
소설의 내용을 보면 작품 속 베레모 현역병은 신군부 쿠데타 세력을, 곧 민간인이 될 전역병은 광주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치환됩니다.
그렇다면 이문열 작가의 ‘필론의 돼지’는,
① 당시 집권세력인 12·12 쿠데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을 소줏값이나 벌자고 승객들을 두들겨 패는 양아치 깡패 무뢰배 집단으로 묘사해놨고,
② 반면 5·18 희생자인 민주화 운동가를 얼굴 없는 목소리에 선동당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불사의 악귀”(소설 속 실제 표현입니다)로 은유한 셈이 돼버렸습니다.
8장짜리 단편소설 한 편이 군정(軍政)과 시민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유였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등단 2년차’ 때였습니다.
책 서문을 읽어보면 이들 작가들은 책이 출간되기 1년 전인 1979년 8월 15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첫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은 ‘어제’와 같았습니다. 몇 개월 뒤인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려 세상의 지축이 바뀔지, 12·12로 전두환 신군부가 국정을 장악해 군정이 이어질지 아무도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이듬해 봄 5월에 한국현대사 최악의 비이 발생할 줄도 알 수 없었습니다.
군인을 소재로 다뤘다는 이유로 이문열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새하곡’도 유통이 금지됩니다. 지금까지 총 판매부수가 3000만부가 넘는 초(超)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 작품 가운데 드물게 판금 조치를 당한 작품들이지요.
군정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1987년에 들어서야 ‘필론의 돼지’는 이문열 중단편 소설집 ‘구로 아리랑’에 실리며 비로소 어둠 속에서 빠져나옵니다. 7년 만이었습니다. 1987년 11월 출간된 소설집 ‘구로 아리랑’ 작가 후기에 이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83년 후반 및 84년 초반, 그리고 87년에 쓴 작품들과 그 이전에 씌어졌더라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독자들에게 읽히기 어려웠던 작품들의 묶음이다. 특히 약간 손을 댔으나마 ‘필론의 돼지’를 싣게 된 데는 야릇한 감회마저 느낀다.” (347쪽)
이 작가는 1980년 처음 소설을 쓸 당시의 ‘베레모’를 1987년 판에서는 ‘검은 각반’으로 바꿉니다. 각반은 군인들이 군화 위에 신는 보호대입니다.
베레모를 검은 각반으로 바꾸면서 ‘군홧발’의 의미를 강조하는 한편 베레모가 환기하는 공수부대 상징성을 다소 비껴갔습니다.
심민화 덕성여대 명예교수와 최권행 서울대 명예교수가 함께 번역해 2022년 출간한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 제14장을 보면 필론(혹은 퓌론, 기원전 360~275년)의 이야기가 자세합니다. 필론은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자입니다.
필론은 배를 타고 가다 거대한 풍랑을 만납니다.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었는데 돼지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성(풍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괴로운데, 오히려 돼지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이성과 지식이 평정과 고요를 방해한다고 의미를 담은 일화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난리의 와중에 소설의 주인공 ‘그’의 눈에 군대 훈련소 동기 홍동덕이 눈에 들어옵니다. 홍은 참으로 느긋합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서 잠이나 자는 돼지처럼 말이죠.
“나는 당최 시끄러운 게 싫어서···. 자, 쏘주나 한 잔 하소.”
홍은 먹다 남은 소주를 의자 등받이 위로 넘겼다. 그는 맥없이 소주병을 받았다. 그러나 졸음으로 거물거리는 홍과는 달리, 화끈거리는 소주를 병째 부어 넣으면서 그래도 그가 이런 일화를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논 팔고 밭 팔아 그를 대학에까지 보내준 고향의 늙은 부모 덕택이었다.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중략) 필론은 현자(賢者)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뿐이었다. (120쪽)
‘필론의 돼지’가 금서였던 시절을 지나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생명력을 얻는 이유는 갑갑한 회사생활, 민감한 가족관계, 저 멀리 정치권까지도 세상이 언제나 둘로 쪼개져 싸우기 때문일 겁니다.
“보수반동적 세계관에다 상업주의적 기량을 적당히 갖춘 천박한 이야기꾼”, “체제의 충선스런 수호자”, “우리 사회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집단의 폭력성에 대하여서는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등 비판은 이문열을 겨냥한 혹독한 화살입니다.
반면, “능란한 이야기꾼”, “많은 비평가들은 다른 작가들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대하면서도 유독 이문열에게만은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등의 옹호 발언은 이문열 소설의 가치를 영원히 존속할 문장일 겁니다.
극단적으로 나뉘는 평가 사이에서 이문열 소설가는 자리해 왔습니다.
1997년 출간된 장편소설 ‘선택’은 이문열 작가가 페미니즘과 공박한 대표작입니다. 조선조 중기를 살았던 작가의 한 할머니가 여성주의를 “남성을 상대로 한 무한투쟁의 선동”이라고 은근히 비판하는 작품이죠.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살펴보면 이문열 작가의 ‘선택’은 1998년 ‘최악의 페미니즘 도서’로 선정됐습니다. 하지만 ‘선택’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조금 달랐습니다. 출간 약 한 달 만에 10만부 넘게 판매되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 ‘선택’의 주독자층은 공교롭게도 ‘주부’였습니다.
촌읍으로 부임한 선생이 동네 부랑자 ‘깨철이’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알고 보니 깨철이는 마을 수많은 여성들의 성적 쾌락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였다는 설정의 소설이었습니다. 현대 기준으로는 비판의 소지가 상당하지요. 그러나 임권택 감독, 안성기 정윤희 주연의 영화 ‘안개마을’로 영화화됐고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을 휩쓸었습니다.
2001년 11월 3일. 그의 집이자 후학을 위한 레지던스인 부악문원 앞에서는 이문열 작가의 ‘책 장례식(책 반환)’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그 유명한 ‘홍위병 발언’ 후폭풍이었습니다.
시민단체 소속 남성들이 이문열 책 733권을 관 모양으로 만들어 들고, 10세 소녀에게 ‘책 영정’을 앞세우게 한 이 사건은 당시 큰 논란이었습니다. 책의 ‘장례’를 치른 참가자들은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가 끝나고 해당 단체는 이문열 작가의 수백 권 책을 고물상에 ‘단돈 10원’에 팔기도 합니다. 이문열 작가의 발언을 규탄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게 될 소설가 이문열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하고 낭인으로 살다 소설에 입문한 늦깎이 소설가.
작품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세인의 눈을 사로잡아 출판계 지형을 바꾼 베스트셀러 작가.
북(北)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울분이 내면의 저변을 이루었고, 사회가 잃어버린 영웅의 귀환을 바랐던 보수주의 문인.
좋게 말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뚝심을 지켰던 예술인. 그러나 역으로 표현하면 진보에 대한 과격한 언사와 행동으로 늘 반목했던, ‘체제의 부름’에 순응했던 기득권 작가.
차라리 그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거나 발언하지 않고, 연작소설 ‘젊은 날의 초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작가로 남았다면 평가는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어느 날 한 번은 그날의 마지막 질문으로 ‘이제 시대와의 불화를 끝마치고, 세상과 화해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라고 용감하게(?) 물었습니다.
그때 적어둔 답을 옮겨 적으며 글을 맺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보다는 억울함이 없지 않다. 그건 어떤 치욕의 감정이다.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일에 확정적으로 개입돼 버린 것과 같은, 말끔히 털지 못한 그 무엇이 남게 될 것만 같아서다. 그러나 성질 나쁜 포악한 악인으로 죽을지언정 비루하게, 비굴하게 살다 죽었다는 말 만큼은 정말 듣기 싫다. 그게 나의 마지막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기억하든 한국문학은 분명히 이문열의 문장에 빚졌고, 한국사회도 이문열 문장의 자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평가는 독자의 몫입니다.
※ 다음 주에는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 장편소설 ‘동조자’를 다룹니다. 박찬욱 감독이 HBO 드라마 시리즈로 연출 중인 작품입니다. 현재 베트남 출판 금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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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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