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는 살만한 곳 아냐” 신도시 설계가가 말하는 이유 [창+]②

구경하 2023. 7. 2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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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 아래 분당

1기 신도시가 등장했을 때 유행하던 말입니다. 30여 년 전, 정부가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쾌적한 주거환경을 선보인 1기 신도시는 이후 한국 신도시 개발의 원형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1기 신도시 중 분당, 일산, 평촌을 책임진 도시설계가는 "신도시는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늘 말한다고 합니다. 바로 '한국 도시설계의 역사'로 불리는 안건혁 서울대 도시환경공학부 명예교수입니다.

시사기획 창 '오래된 신도시의 꿈' 편을 제작하면서, 취재진은 안건혁 교수를 만나 1기 신도시 설계 당시 구상과 바람직한 정비 방향을 물었습니다.

■ 안건혁 교수 "신도시 설계 목표는 '정이 가는 동네'"

1기 신도시 분당, 일산, 평촌의 도시계획과 설계를 담당한 안건혁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Q. 한국에서 신도시를 가장 많이 계획하셨지만, 저서 <분당에서 세종까지>에서 "신도시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A. 도시는 정이 가야죠, 자기가 사는 '동네'라는 정감 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한옥에 살았는데, 아파트로 이사 가니까 아파트 동네는 굉장히 삭막하고 동네라는 게 형성이 되지 않았어요. 길 따라서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마을이 더 정감이 가죠.

신도시는 아무리 잘 만들어놔도 그 옛날 기존 시가지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런 정감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파트는 별로 선호하지 않죠. 그러나 할 수 없이 가서 사는 거죠.

물론 신도시도 시간이 지나면, 벌써 30년이 넘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신도시가 아니죠. 구도시죠. 그래서 이제는 거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정감이라는 걸 충분히 갖고 있을 만큼 도시가 성숙 됐을 거로 생각해요. 신도시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 아파트에 대해서 무슨 정감을 갖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사람에 따라 태어나고 자라는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끼겠죠.

Q. 분당 신도시를 설계하면서 아파트 단지에 'OO 마을'이란 이름을 붙이자고 처음 제안하셨습니다.

A. 건설회사 이름을 붙여서 아파트 단지를 부르기 시작을 하면 '어느 아파트는 △△이 지었대' 하는 거로 아파트의 등급이 매겨지죠. 실제 그 아파트를 잘 짓고 좋은 환경을 만드느냐, 아파트의 질을 가지고 등급이 매겨지는 게 아니고 건설회사의 이미지나 상품성으로 단지 이름을 정한다는 게 상당히 못마땅했었어요.

실제로 그 단지의 주인은 주민인데, 거기에 왜 건설회사 홍보를 하는 상표를 붙이냐는 거죠. 그래서 그걸 없애자. 그걸 없애기 위해서는 단지마다 고유의 이름을 만들어 붙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 재건축하는 아파트들 보면 원래 갖고 있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이 이름을 다 바꾸려고 하죠. 저는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2023년 4월 1기 신도시 가운데 처음으로 정비사업을 위해 이주한 분당 무지개마을 4단지의 모습. 무지개마을 4단지는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이른바 '주공아파트'로, 건설사 브랜드가 아닌 무지개마을로 불렸다.


■ '더 낮게, 더 쾌적하게'…용적률 낮추려 정부와 대립하기도

Q. 1기 신도시는 발표에서 입주까지 6년 만에 진행됐습니다. 정부의 무리한 일정에 항의해 당시 도시계획학계는 1기 신도시의 계획과 설계를 집단 거부했는데요, 당시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이 어떻게 1기 신도시 설계를 하게 됐나요?

A. 정부가 200만 호를 건설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마당에 그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겠죠. 그렇다고 하면 누군가는 이 계획을 세우고 정부에 도움을 줘야 하고 국민에게 주택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거를 안 하겠다고만 해서 안 될 일은 아니란 말이죠. 첫째는 누군가는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고요.

만약에 누군가는 그 계획을 해야 한다고 하면, 당시에 국토개발연구원에서 저를 비롯한 저희 연구팀들이 하는 것이 그래도 제일 낫겠다. 일반 민간인, 개발업자들한테 계획을 넘기는 거보다는 그것이 좀 더 대정부 협상력도 높이고, 또 좋은 계획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생각해서 저희는 처음부터 저희가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거죠.

Q. 실제로 정부와 협상하면서, 용적률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고요?

A. 정부는 200만 호를 채우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넓은 땅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땅을 확보하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도시로 지정된 곳에 좀 더 많은 주택을 지어야 되겠다고 계획에서 용적률을 굉장히 높여 잡았어요.

그래서 국토개발연구원 연구진들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적정 밀도의 환경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판단해서 '용적률을 조금 낮추자. 그리고 인구도 좀 줄이자' 해서 상당히 정부 측, 특히 그 당시에 토지개발공사하고 상당히 옥신각신했죠.

그래서 조금 줄였어요. 원래 분당의 경우는 42만 명을 목표로 했는데 저희가 그거를 40만 명 미만으로 줄이자. 일산도 30만 명을 목표로 해서 발표가 됐었는데 그걸 저희가 27만으로 줄였죠. 많이 줄이진 못했지만, 그만큼이라도 줄임으로써 단지의 용적률을 낮추는 데 상당히 효과를 봤다고 할 수 있어요.

1989년 7월 신도시 개발계획 공청회에서 당시 안건혁 국토개발연구원 수석연구원이 분당 신도시 기본구상을 발표하는 모습. KBS 영상 아카이브.


Q. 1기 신도시 중 평촌, 분당, 일산의 도시계획과 설계를 도맡아 진행하셨습니다. 초기 구상이 궁금합니다.

A. 5개 신도시 이전에 이미 70년대 중반에 창원, 반월, 과천 신도시를 만든 경험은 있었죠. 그러나 그 도시들을 봤을 때 의도는 좋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선 밀도가 적정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는 과거 신도시들이 공원 녹지가 좀 부족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들이 설계가 아주 디테일하게 되지 않고 굉장히 거칠게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그런 점을 좀 감안해서 저희들이 좋은 도시를 만들고자 했죠.

새로 짓는 5개 신도시는 과거 신도시를 만들 때의 그 경험을 살려서 '시행착오를 범하지 말자, 좀 더 나은 신도시를 만들겠다.' 생각하고 착수를 했습니다.

■ "신도시 정비 필요하지만, 용적률 500% 동의 못 해"

Q. 1기 신도시가 준공된 지 30년이 지나면서 '노후 계획도시 정비 특별법'이 발의됐습니다. 계획도시를 30년 만에 정비하는 건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사례인데요, 설계 당시에 정비 시점을 언제로 예상했나요?

A. 그때는 30년 후쯤 되면 재정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또, 우리가 그 당시에 계획할 때는 '재정비가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야겠다.', '그 당시 수준에서는 거의 완벽한 도시를 만들어야겠다.' 하는 생각만 했지 재정비를 할 거고 도시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이든 도시든 수십 년, 수백 년 가는 건 아니니까 조금씩은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요. 지금 나오는 얘기처럼 전면적으로 다 재개발하는 건 당시엔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일산 신도시의 상징인 호수공원. 안건혁 교수는 일산 신도시를 계획하면서 중심부의 자투리땅에 물을 채워 호수공원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Q. 1기 신도시는 주택은 노후화됐지만 주거환경은 여전히 쾌적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신도시 정비의 필요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재정비 필요성은 있죠. 도시는 거기 사는 주민들이 변경의 필요를 느끼고, 또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면 그건 고쳐나가야죠. 그것이 재개발의 형태든 아니면 대수선 방식으로 하든 간에 그건 자연스러운 거 아니겠어요? 제가 원래 도시계획을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 대해 어떤 반대되는 의견을 갖지는 않아요. 그건 얼마든지 변경해도 좋다.

다만 변경하는 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가치관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20년, 30년을 미래에 또 살아나가야 될 텐데, '그때 필요한 도시 기능이 무엇인가', '그때 필요한 주택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바꾼다면, 전혀 저는 반대하거나 거기에 대해서 불평을 할 생각이 없어요.

용적률은 주민들의 요구가 워낙 강하니까 많이 높여줘도 된다고 생각을 해요. 다만 도시계획 변경을 할 때 지켜야 하는 것은 원래 도시계획이나 도시설계의 취지가 뭐였는가, 그 원칙만 지키면 용적률이나 용도는 바꿔줘도 실제로 달라질 건 없다고요.

노후 계획도시의 특별정비구역 개념도. 특별정비구역은 아파트 1개 단지가 아닌 블록 단위로 통합 정비한다. 국토교통부 보도자료를 토대로 이훈길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겸임교수가 펜드로잉으로 스케치.


Q. 노후 계획도시 특별법은 공공성을 갖추는 것을 조건으로 '최고 용적률 500%'를 허용할 방침입니다. 고밀 개발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A. 다 그렇게 되진 않겠죠. 그런데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난센스고, 도시를 진짜 상품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상이죠. 그거는 주민들이 원할 수도 있고, 정부가 원할 수도 있고, 건설업자들이 원할 수 있는, 삼박자가 맞았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어느 도시계획가한테 물어보더라도 '500%를 하겠다.' 그러면 글쎄요, 대부분이 동의하진 못할걸요?

Q. 1기 신도시에는 1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고 있고, 이들이 신도시 정비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설계가로서 주민들에게 조언하신다면요?

A. 욕심 좀 그만 내라고 그렇게 얘기해 주고 싶어요. 그게 욕심을 낸다고 되는 일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사는 환경, 아파트, 도시를 좀 더 쾌적하고, 문화가 살아있는, 정서가 깃들 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야죠. 돈만 계산해서 내가 재건축을 하는데 얼마를 부담해야 하느냐? 그걸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면 그 도시가, 환경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글쎄요, 제가 이런 얘기 한다고 달라질 건 하나도 없지만, 꼭 얘기한다면 그런 얘기를 해 주고 싶어요. '주택이나 아파트를 상품으로 생각하지 말아달라' 그런 얘기죠.

Q. 1기 신도시 현장에선 정비를 위한 논의가 속도전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조언하신다면?

A. 지금 진행되는 양상을 보면 조금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무 나눠져 있고, 지금 주민들도 굉장히 혼란스러워할 거예요. 정비에 참여할지를 결정하기도 아마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당장 3~4년 후의 시장 상황을 예상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5년, 10년 후의 미래가 어느 정도 가시적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누구도 뭐라고 장담할 수 없을 거예요.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시간을 좀 갖고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우리가 수요가 있어서 주택을 더 많이 공급해야 할지, 그에 대한 확실한 어떤 전망이 나올 때까지는 글쎄요. 섣불리 결정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을 해요.

다만, 아까 얘기한 대로 우리가 미래의 주거 환경을 생각하고 좀 더 미래 수요에 적합한 기능을 도시가 갖추게 하기 위해서 계획을 변경한다는 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용적률이나 건물 높이를 높여서 수익성을 제고하고 주민들에게 더 인기를 얻어서 영합해서 표를 얻겠다' 이런 생각으로 결정한다면 그건 좋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Q. 도시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인가요?

A. 그럼요.

안건혁 교수의 인터뷰 내용은 영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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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일시 : 2023년 7월 18(화) 밤 10시 20분 KBS 1TV/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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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 기자 (isegori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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