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고래가 보여주는 '어머니의 위대함'…"노모가 아들 지킨다"[사이언스 PICK]
어미 범고래 연령 따라 아들 범고래 상처·흉터 수 달라져
무리 이끄는 암컷 범고래…번식기 이후에도 '사회적 역할' 多
[서울=뉴시스]윤현성 기자 =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외모와 다르게 범고래는 날카로운 이빨과 높은 지능, 빠른 속도, 흉포한 성미까지 갖춘 바닷속 최고의 포식자 중 하나다. 영미권에서는 범고래를 아예 '킬러 웨일(Killer whale)'이라고 부를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사나운 맹수인 범고래들도 오랜 기간에 걸쳐 어머니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2일 학계에 따르면 수컷 범고래들이 싸울 때 이미 폐경에 접어든 나이 든 어미 범고래가 방어에 나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엑시터대학교 연구팀은 1976년부터 47년 간 범고래 무리들 간 관계에 대한 기록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게재했다.
흔히 범고래 무리는 나이든 암컷과 그 자녀, 손자들로 구성된 모계 사회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수컷 범고래가 다른 무리의 암컷과 짝짓기를 할 때를 제외하면 암수 모두 어미 범고래와 평생을 한 무리에서 지낸다.
범고래 개체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바다생물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하고, 무리 생활까지 하는 만큼 인간 외에는 범고래의 천적은 사실상 없다. 결국 범고래들이 입는 상처는 주로 범고래 간 놀이나 싸움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구팀은 이같은 범고래의 상처 데이터에 대해 분석한 결과 수컷 범고래가 암컷 범고래보다 흉터가 더 많고, 수컷 중에서도 일부 개체가 흉터가 더 적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50여년에 걸친 범고래 무리 간 관계를 분석하자 이같은 흉터에 특정한 패턴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 수컷 범고래들이 속한 무리에 폐경이 지난 나이 든 어미 범고래가 살아있으면 흉터가 더 적었던 것이다. 반면 생식 연령에 있는 젊은 어미 범고래와 함께 지내거나 고아인 수컷 범고래들은 훨씬 더 많은 부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연구팀은 나이 든 암컷 범고래가 범고래 무리 간 사회적 갈등으로부터 자신의 아들들을 보호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단, 수컷 범고래들 간 싸움에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게 아니라 마치 사람처럼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싸움을 중재하는 식이다.
아들과 달리 딸 범고래의 경우에는 이같은 패턴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미 범고래가 나이가 들었든, 생식이 가능할 정도로 어리든 암컷 범고래가 가진 흉터의 빈도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연구팀은 암수 범고래의 생태 차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암컷 범고래는 평생을 한 무리에서 지내고, 그 무리에서 출산을 할 경우 무리 전체가 새끼의 육아를 함께 책임진다. 반면 수컷 범고래는 무리를 떠나 다른 무리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고, 그 무리에 자식을 남겨둔 채 원래의 무리로 돌아온다.
범고래 무리의 가장인 늙은 어미 범고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무리가 육아를 하는 책임과 희생을 지지 않으면서도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결국 딸 범고래의 자손들은 이미 내 무리 안에서 안전하게 유전자를 이어갈 수 있으니 아들 범고래들을 보호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두고 연구팀은 "수컷 범고래 간 싸움에서 어미 범고래가 방어에 나서는 것은 단순한 헌신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을 보호함으로써 아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확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연구팀은 이번 연구결과가 왜 암컷 범고래가 번식기 이후에도 수십년 가까이 더 오래 살아가는 지를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번식기 이후에도 수십년 이상의 수명을 갖는 생물은 인류와 소수의 암컷 고래종 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늙은 암컷 범고래가 범고래 사회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연구에서는 나이든 범고래들이 무리를 풍부한 사냥터로 안내하거나, 자신의 사냥감을 나눠주기도 한다는 사실이 파악된 바 있다. 이같은 역할에 이어 무리 간 갈등 중재자 역할까지 하는 만큼 자연적으로 수명이 길어졌다는 게 연구진의 판단이다.
연구진은 이같은 범고래의 생태 연구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일부 지역에서 범고래가 멸종 위기에 놓였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연구를 주도한 찰리 그라임스 엑시터대 고래 연구원은 "지난 수십년 간 인간에 의한 포획과 기후 변화로 서식지가 파괴되며 이른바 '남쪽 서식' 범고래의 수는 73마리 수준으로 급감했다. 향후 50년 안에는 이들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hsyh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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