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입 ‘소수인종 우대정책’ 폐지, 그러면 ‘레거시 제도’는?
지난 6월28일 보수 판사들이 장악한 미국 연방 대법원이 오랜 세월 미국 대학의 관행으로 굳어진 신입생 선발 제도를 송두리째 뒤집어 사회적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다. 대입제도의 ‘소수인종 우대정책(어퍼머티브 액션, Affirmative Action)’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것이다. 비영리 보수 단체 ‘공정 입학을 위한 학생들(SFFA)’이 2014년 하버드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상대로 ‘신입생 선발에 인종적 요인을 고려한 행위는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한 지 약 9년 만에 나온 판결이다.
미국에는 지역 분교를 포함해 대학이 약 4000개 있다. 이 가운데 어퍼머티브 액션과 관련해 주목을 받는 대학은 아프리카계(흑인)와 히스패닉계 학생들이 좀처럼 들어가기 힘든 엘리트 대학들이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물론 애머스트, 콜게이트 같은 유명 대학들이 아프리카계와 히스패닉계 학생은 물론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입학 문호를 넓힌 것도 어퍼머티브 액션 덕분이었다. 어퍼머티브 액션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이들 대학의 신입생 대다수는 백인 학생이 차지했을 게 분명하다. AP통신의 최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63%가 연방 대법원이 어퍼머티브 액션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물론 어퍼머티브 액션 때문에 명문대에 진학하려던 실력 있는 백인 혹은 아시아계 학생들이 신입생 선발 시 피해를 보았다는 ‘역차별’ 문제로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SFFA가 소송을 제기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1996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9개 주가 어퍼머티브 액션을 금지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아프리카계,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 출신 자녀의 대학 입학률이 금지 이전에 비해 30~40%까지 급감해 충격을 던졌다. 다른 주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문제의 9개 주 외에 나머지 41개 주의 대학들도 더 이상 ‘인종적 요인’을 앞세워 소수인종 출신 학생들에게 입학 특혜를 줄 수 없게 되었다. 하버드대의 경우, 올해 입학한 신입생 중 15.3%가 아프리카계, 11.3%가 히스패닉이었다. 하지만 어퍼머티브 액션의 폐지로, 내년에는 이 비중이 떨어질 게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각 대학은 어떻게 ‘재학생 다변화’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부모의 소득이나 인종 또는 다른 불리한 요인을 극복한 학생들에게 입학 시 특전을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역경을 극복한 소수인종 출신 학생들의 경험담을 입학 사정에 적극 반영해달라는 주문이지만, 이는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오히려 오랜 세월 부유층 백인 학생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레거시(legacy) 입학 특전’의 폐지 여부에 쏠리게 되었다.
‘레거시 제도’ 입학생, 많게는 23%에 달해
1922년 다트머스 대학이 처음 도입한 레거시 제도는 특정 대학을 나온 부모의 자녀가 같은 대학에 원서를 내면 다른 학생에 비해 가산점을 부여해 입학 시 특전을 주는 제도다. 이들의 논리는 이 제도 덕분에 동문 사회가 커지고, 기부금도 더 많이 확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의 ‘레거시 제도’를 두고 불공정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AP통신이 미국 주요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레거시 입학생’ 비율이 적게는 4%에서 많게는 23%에 달했다. 특히 노트르담, 서던캘리포니아(USC), 코넬, 다트머스 대학의 경우 레거시 입학생이 아프리카계 학생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의 레거시 입학생도 전체 입학생의 10~15%에 달했다. 올해 예일 대학 졸업생 4000여 명 가운데 12%가 레거시 수혜자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경우 레거시 입학률이 한때 30%까지 치솟았지만 지난 몇 년 꾸준히 줄어 지금은 10%대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레거시 지원자의 대다수가 백인 학생이고, 부유층 자제라는 점이다. 2019년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하버드 대학의 경우 레거시 제도로 진학한 학생의 약 70%가 백인으로 나타났다. 레거시 제도가 지금처럼 유지될 경우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에 따른 아프리카계와 히스패닉 학생의 감소분까지 백인 학생들이 차지할 수 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하버드 대학 총장을 지낸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이 연방 대법원 판결 직후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향후 주요 대학들이 레거시 지원자들에 대한 특혜를 가장 우선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비영리 진보 단체 ‘민권을 위한 변호사들(Lawyers for Civil Rights)’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레거시 입학 특전은 백인 동문과 기부자들의 자녀를 우대하는 차별적 전형”이라며 하버드 대학 이사진을 상대로 ‘레거시 제도 폐지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단체는 소장에서 “레거시 제도로 하버드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개 백인이고, 이들이 전체 신입생의 15%를 차지한다”라고 주장했다. 해당 소송과 관련해 하버드 대학 니콜 루라 대변인은 “향후 몇 주 혹은 몇 달 안에 연방 대법원 판례에 따라 하버드 대학의 본질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겠다”라고 밝혔다.
레거시 제도와 관련한 불공정 논란이 커지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존스홉킨스 대학, 애머스트 대학,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등 일부 대학들이 레거시 제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요 대학들은 여전히 꿈쩍도 않는다. 퓨리서치센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민 가운데 75%가 레거시 제도에 부정적이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하원의원은 “레거시 제도는 특권층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이다. 연방 대법원은 레거시 제도도 폐지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출신 공화당 대선주자인 팀 스콧 상원의원은 보수 매체인 〈폭스뉴스〉에 출연해 “연방 대법원 판결 이후 하버드 대학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동문 자녀에게 입학 특혜를 주는 레거시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방 의회나 주정부 차원의 레거시 제도 폐지 움직임은 지지부진하다. 대학의 레거시 제도를 폐지한 주는 콜로라도가 유일하다. 컬럼비아, 코넬, 콜게이트 등 주요 대학이 있는 뉴욕주에선 지난해 처음으로 레거시 제도 폐지안이 논의되었지만 도입에 실패했다. 코네티컷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예일 대학을 비롯한 일부 사립대의 맹렬한 반대로 좌초했다. 하지만 이번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변수로 등장했다. 향후 아프리카계와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 학생들의 입학률이 현저히 떨어질 게 분명한 만큼 하버드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이 재학생 다변화를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레거시 제도가 폐지되거나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지원자의 ‘인종 외 다른 역경 요인’을 어떻게 반영할지에 대해서도 상당 기간 논란이 이어지리라 보인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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