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럭셔리하게… 경로를 이탈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강동삼의 벅차오름]
우연히 어느 국회의원과 스치며 명함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메일 한통이 전송됐다. 그가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조금 더 늦게 그의 부고와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읽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의 작가 밀란 쿤데라(1929.4.1~2023.7.12). 프랑스로 망명한 체코 출신인 그는 지난 12일 향년 94세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 1968년 민주화운동의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던 쿤데라는 책들을 빼앗기고 심지어 체코의 국적을 박탈당하기도 했었다. 그는 2019년 90세가 돼서야 국적을 회복했다. L의원은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을 발췌해 보내왔다.
무심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불현듯, 오늘 하루는 재즈같은 삶을 살아보고 싶어진다. 누군가 그랬다. 재즈선율에 실린 트럼펫 소리가 가슴을 후벼오기 시작하면 나이 들었다고. 그래서 은퇴하면 남자들이 트럼펫을 배우러 다니는 걸까.
#2년 4개월간의 긴 휴식년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용눈이오름…그러나 절반만 모습을 보여준 까닭은
2년 4개월여동안 휴가를 보낸 뒤 지난 7월 1일부터 탐방객들에게 돌아온 용눈이오름을 만나러 가는 길. 카 오디오에서 재즈 트럼펫 연주자 크리스 보티(Chris Botti)의 ‘la belle dan sans regret’음악이 흘러나오자 볼륨을 크게 올린다.
음악을 들으며 용눈이오름의 얼굴에 생기가 돌 지, 아니면 여전히 아픈 그림자가 남아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른 아침이어서 주차장에는 두세대 차량만이 세워져 있어 한산한 모습이다. 모든 사람들이 장마에 지친 모습이다. 이럴때일수록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용눈이를 천천히 마주하며 만져주고 달래주고 싶은 날이다.
자연휴식년제는 오름이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탐방객의 출입을 제한해 자연적으로 식생이 복원되도록 하는 제도다. 용눈이는 그동안 노을과 억새가 장관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방송까지 타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에 치이고 움푹 패이며 몸살을 앓았다. 심하게 지치고, 다치고, 상처가 나는 바람에 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장기휴가를 다녀왔다. 조금씩 패였던 능선은 풀들이 자라고 민들레꽃이 피고 보랏빛 엉겅퀴꽃도 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듯 정상에도 푸릇푸릇 해졌다.
좀 더 오래 휴가를 떠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용눈이는 2년여 만에 돌아왔다. 조금 이른 복귀로 보여 놀랐다. 그만큼 빨리 회복된 거라 믿었다. 실상은 빠른 재생 능력도 있지만, 일각에선 주민과 관광객들의 바람이 더 컸다는 지적이다.
능선이 시작되는 입구부터 풀들이(가을이 되면 억새로 변할 억새풀들이었다) 사람 키만큼 자랄 정도로 무성해져 있었다. 반가움이 앞섰지만, 예전 모습만 생각하고 긴팔 상의와 긴바지를 입지 않은 채 가벼운 차림으로 탐방에 나선 건 실수였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요즘 제주지역에서는 야생 진드기를 매개로 감염되는 중증열소판감소증후군(SFTS) 환자가 늘고 있는데다 최근 목숨을 앗아가는 사고까지 발생해 조심 조심 발걸음을 내딛었다. 수풀더미를 10여분 지나서야 풀들이 거의 없는 능선 오르막으로 접어 들었다. 자연은 위대했다. 용눈이, 그는 정말 몰라보게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야생성을 되찾았다는 사실만으로 젊음을 회복한 것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휴식년제 오름 훼손지 집중조사구역이라는 울타리를 친 곳을 발견했다. 제주참여환경연대와 제주도가 식생회복이 어떻게 되고 있는 지 여전히 조사중인 것으로 보였다. 아직 아물지 않은 걸까.
2년 전만 해도 능선 한바퀴를 돌 수 있었지만, 오른쪽으로 향하는 능선이 출입금지를 알리며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도 관계자는 “저희는 완전 개방한다고 했지만, 울타리가 쳐진 곳은 사유지여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출입을 금하는 울타리를 치는 바람에 절반은 탐방할 수 없어 아쉽다”고 전했다.
사실 제주도 오름 368개 가운데 204개 오름은 사유지이다. 국공유지, 사유지 비율을 따졌을 때 33%이상 되는 곳을 사유지 오름이라고 칭하고 있다. 용눈이오름이 대표적이다.
#상처난 사람들은 마음을 활짝 열기 힘들다… 용눈이오름도 그랬다
용눈이를 한바퀴 돌던 때가 그리웠지만, 결국 발길은 울타리 없는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상은 눈깜짝할 새 도착했다. 남쪽 수산봉부터 성산일출봉이 아른거리고 멀리 우도까지 보였다. 왼편으론 두산봉, 지미봉까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졌다. 아 그런데 또 정상 오른쪽 내리막 능선 길도 막혀 있었다. 완전 개방했지만, 사유지라는 이유로 결국 부분 개방한 꼴이 됐다. 제주도 해당 과에 전화 취재를 하지 않았다면, 한달 10만명이 찾는 명소가 다칠까봐 일부만 개방한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용눈이는 어찌됐든 아쉽게도 마음을 다 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다친 상처는 오래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서걱거렸다. 그런 반쪽만 보여주는 그도, 이렇게 반쪽만 바라보는 나도, 둘 다 머쓱해졌고, 미안해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정상 분화구에서 바라보던 여인네 허리선보다 더 아름다운 능선을 다 헤아릴 수 없어 아쉬웠다. 내려오는 길, 눈에 밟히는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은 이날따라 더 소중한 이웃같았다.
내려오는 길, 바위에 새겨진 용눈이오름 소개를 다시 쳐다본다.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용눈이오름은 해발 247.8m, 높이 88m, 둘레 2685m의 화산체다. 남북으로 비스듬히 누운 이 오름은 부채살 모양으로 여러가닥의 등성이가 흘러내려 기이한 경관을 빚어내며 오름 대부분이 연초록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한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등성이마다 왕릉같은 새끼 봉우리가 봉긋봉긋하고 오름의 형세가 오름이 놀고 있는 모습이라는데서 용유(龍遊)악, 또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형태라는데서 용와(龍臥)악, 용의 얼굴같다 하여 용안(龍眼)악 등으로 표기됐다. 오름 기슭에는 지피식물 미나리아재비, 할미꽃 꽃향유 등이 자생하고 있단다.
내려오니 오전 9시. 모습을 절반만 보여준 탓에 쉽게 끝난 탐방. 여유가 생기자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집으로 가는 대신 경로를 이탈한다. 재즈같은 삶은 느림의 시간일 때 보인다.
2021년 3월 제주관광공사가 공개했던 ‘슬로우로드’(Slow Road) 캠페인이 떠올랐다. ‘내비게이션=빠른 길’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느린 길’로 안내하는 역발상의 전환을 잘 보여줬었다. 신선한 발상이었다. 느린 여행. 느림의 미학이 유행하던 때의 캠페인이었다. 어쩌면 코로나19 팬데믹이 만든 현상이기도 했다. 우린 너무 앞만 보고 살아온 것이다. 뒤도 돌아봐야 하는데. 눈 앞의 풍경을 보다가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아무튼 슬로우로드 캠페인은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검색했을 때 경로를 이탈하게 했다. 느리게 가지만, 아름다운 길로 안내한다. 용눈이오름에서 돌아오는 길이 그랬다.
#느림의 미학처럼… 경로를 이탈해 들어간 곳은 천년의 사랑이 전해지는 비자림숲
경로이탈 첫 방문지는 평대리 천년의 숲 비자림이었다. 제주도민은 한번쯤 가본 곳. 웬지 이 장마철에 생각난 건 조금 시원한 숲속 산책을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용눈이오름에서 15분이면 도착할, 코닿을 거리에 있었다. 천년의숲 비자림 입구는 보랏빛 수국이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하얀 운동화에 잉크가 퍼진 듯, 파란색 수국에 마음까지 청량해진다.
벼락맞아 암수가 붙어 자란 연리목 비자나무를 입구에서 만난다. 해설사는 “약 100년 전에 벼락을 맞아 오른쪽 수나무의 일부가 불에 탔지만, 다행히도 암나무에는 불이 번지지 않아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며 “주변마을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금슬 좋은 부부나무를 신령스럽게 귀하게 여기고 소원을 빌곤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사람들은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소문에 일부러 이곳을 찾아와 소원을 빌곤 한단다. 조금은 안타까운 세태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로또 당첨되게 해달라고 많이 빈다는 말도 전한다.
비자나무는 살아 천년을, 죽어 천년을 산단다. 닭뼈같이 생긴 마디마디가 1년이다. 그 마디가 바람결에 떨어져 나갔다. 한 마디를 주워 껍질을 벗겨내면 속살이 하얗다. 해설사는 이 마디를 설명도 할 겸 아름답게 색칠해 장신구를 만들어 갖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장신구를 불쑥 내게 내민다. 귀한 거라며.
이곳 비자림에는 500~800년 된 비자나무 2878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고려 명종 20년(1189)에 태어난 새천년 비자나무 앞에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단체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수학여행 온 듯 재잘거린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보면 입구의 연리목과 다른 연리목 사랑나무도 있다.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하며 줄기가 연결되면 연리목, 가지가 연결되면 연리지라고 한다. 이 비자나무 연리목은 두나무가 가까이 자라다가 지름이 굵어지면서 맞닿게 되고 서로 움직일 수 없으니 둘이 합쳐 하나가 되었단다. 이런 나무를 잘라보면 마치 쌍가마처럼 한꺼번에 두개의 나이테 두름이 들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연리목은 만들어지는 과정이 마치 부부가 만나 한몸이 되는 과정을 아주 닮았다. 사랑나무라고도 하며 남녀간의 변치 않는 사랑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비자나무 앞에 소개된 둥그런 원형 돌 안내판에는 영원한 사랑을 빌어보라고 권유까지 한다. 영원한 사랑은 정말 있을까.
문득, 지나오다가 해설사가 가리키며 알려준 천남성 식물을 또 만난다. 장희빈이 먹고 죽은 사약이 바로 천남성 열매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가을이 되면 포도송이 만큼 빨갛게 열매가 올라온다. 여인네들끼리 왔을 땐 반 우스개 농담도 한단다. “우리 집에 한사람 먹일 사람 있다”고.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무끈모루숲과 안도르 카페
경로를 이탈했더니 이야기까지 이탈하려나 보다. 비자림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비자림로에서 색다른 푯말을 보고 멈췄다. 무끈모루숲. 송당리 비자림로 안돌오름 직전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어 무심코 지나치면 모르고 놓치기 십상이다. 모루는 산마루의 마루로 작은 언덕을 뜻한다. 바로 앞에 안도르 카페가 생긴 후 사진 스폿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둘러싸인 나무 사이로 드넓은 들판이 보이고, 멀리 삼나무숲과 오름이 한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사진을 찍으면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피사체에 잡히는 듯 하다. 근처 비밀의 숲으로 유명해진 안돌오름과 묶어 사진을 찍으러 오는 여행자들이 늘고 있다.
안도르 카페에선 촉촉하고 부드러운 몽블랑에 크림치즈가 흘러넘치는 안돌오름이라는 이름의 케이크를 비롯, 한라봉 케이크와 돌하르방 블루베리무스, 한라산 케이크 조각도 판다. 당근빵도 부드럽고 달달해 찾는 이가 많다. 우연찮게 경로를 이탈하니 보이지 않던, 먹을 것도 보인다.
경로를 이탈하면서 느낀 건, 럭셔리한 여행은 명품 옷과 명품 차를 끌고 호텔에서 식사를 하는 결코 값비싼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느리게 여행하다 보니 ‘이어령(1934.1.15~2022.2.26)의 마지막수업’에 나온 대사처럼 럭셔리한 여행을 한 기분이다. 죽음을 앞둔 노교수는 말한다.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라며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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