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시간의 마모를 견뎌낸 고전’ 마르께스 데 리스칼 XR
2022년 9월, 스페인 중부 시골마을 리오하(Rioja).
내로라하는 전 세계 와인 평론가들이 오로지 포도밭 뿐인 이 시골에 모였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와이너리 가운데 한 곳인 마르케스 데 리스칼(Marqués de Riscal)에 모였다. 목적은 동일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지금부터 161년 전 1862년 첫 와인을 내놨다. 우리나라는 철종이 통치할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링컨이 노예해방선언문을 내놨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출간한 때도 이 해다.
와인 대부분은 생명력이 보통 길어야 수십년 정도다. 보관 상태에 따라 다소 늘기도, 줄기도 한다. 160년이 넘은 와인은 전 세계적으로도 몇병 되지 않는다. 자연히 100년이 넘는 와인에 대한 연구 역시 드물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창립자의 증손자 프란시스코 후르타도 데 아메자가는 이날 창립 당시 지었던 지하 와인 저장고에서 곰팡이와 흙이 잔뜩 묻은 와인 서른 병을 꺼냈다.
증조부가 이 와이너리를 세운 이후, 단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고이 보관하던 와인들이다. 1862년과 1870년, 1886년, 1899년, 1909년, 1911년 같은 100년 전 와인들이 줄줄이 등장하자, 이 자리에 모인 평론가들은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평생 여러 와인을 시음해 온 와인 평론가들에게도 이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이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모인 게시판은 술렁였다. 평론이 올라오기 전까지 애호가들은 와인 맛과 향이 어떨지 반신반의했다. 일부는 맛과 향은 고사하고 와인이 과연 마실 수나 있는 상태인지 여부를 의심했다.
“어떤 말로도 기록하기 부적절한 역사적인 와인.
부드럽고 순하며 사랑스러운 자연의 단맛이 느껴진다.
나이가 지긋한 와인이지만, 놀라울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다.”
콜린 헤이 드링크비즈니스 에디터
161년 된 와인을 마신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이 와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 파이스는 “이 와인은 지금 마실 수 있는 그 어떤 와인보다 더 복잡하다”며 “바로크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와인”이라고 말했다.
바로크는 17세기 유럽 일대를 사로잡았던 예술 사조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궁정을 중심으로 퇴폐적이라는 평가가 돌만큼 화려하고 웅장한 미술과 건축, 음악 형식이 득세했다.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와인 종주국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역시 스페인에 자리잡고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와이너리를 만든 리스칼 후작은 프랑스로 망명했던 스페인 귀족이다.
스페인에서 왕위 계승 정당성을 놓고 카를로스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프랑스 유명 와인 산지 보르도로 몸을 피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고향 리오하에 프랑스 양조 기술을 가지고 돌아 왔다. 그가 세운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스페인 최초의 보르도 스타일 와이너리로 알려졌다.
그 이전 리오하 와인은 프랑스는 물론 스페인 내에서조차 제대로 된 와인으로 대접 받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는 오래 전 우리나라 탁주 양조장들이 그랬듯, 대형 참나무통에 와인을 넣어뒀다가 필요한 만큼 소비자가 가져온 유리병에 따라주는 방식으로 와인을 팔았다.
프랑스처럼 직접 만든 와인을 병에 넣어서 완성된 형태로 팔면 그만큼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주질(酒質)을 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와인을 담을 유리병을 사고, 그 수많은 와인 병을 보관하는 데 쓰인 비용을 회수할 수 없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과감하게 이 지역 다른 와이너리들이 고수하던 전통 스페인식 양조 방식을 버리고, 프랑스 포도 품종을 일부 도입해 프랑스처럼 와인을 만드는 실험을 시작했다.
세계 와인 시장에서 변방에 속했던 스페인 시골에 처음으로 선진 와인 시장이었던 프랑스 보르도 양조 기술을 접목시킨 셈이다. 양조 과정에서도 포도 줄기를 제거하고 프랑스산 나무통을 사용해 당시 유럽 와인 애호가 입맛을 겨냥했다.
그 결과 1895년에는 프랑스가 아닌 다른 국가 와인 가운데 처음으로 ‘보르도 전시회 최고 영예 인증(Le Diplome d’Honneur de l’Exposition de Bordeaux)’을 받았다. 스페인 왕궁에는 현(現)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 아버지 시절부터 와인을 공급하고 있다.
와인 품질에 대한 집착은 이 와이너리 특유의 ‘예술 경영’으로 이어진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의 현 오너 호세 루이스 무기로(Jose Luis Muguiro)는 와인 전문지 디캔터와 인터뷰에서 “선조들이 스페인에 처음으로 프랑스식 양조를 도입했던 것처럼 옛스런 와이너리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한 ‘복합 문화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흔히 ‘와이너리’하면 유럽이나 미국 구릉지대에 포도밭이 넓게 펼쳐진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 한복판에는 스위트룸 12개 등 총 43개 객실을 갖춘 럭셔리 부띠크 호텔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서 있다. 이 호텔은 건축을 현대예술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프랭크 게리가 설계를 맡았다.
프랭크 게리는 미국 페이스북 본사,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2019년 서울에 루이비통 메종 서울을 지은 건축 거장이자, 은박지를 구겨 놓은 듯한 건물 디자인으로 명성이 높다. 포도밭을 배경으로 서 있는 지극히 현대적인 이 호텔은 단위 면적 당 건설비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호텔 중 하나다.
세계 최고급 부띠크 호텔 모임 ‘럭셔리 콜렉션’은 이 기묘하지만 아름다운 조합을 높게 사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을 정식 멤버로 받아 들였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세계적인 고급 와이너리로 꼽히는 샤또 마고(Margaux) 수석 와인메이커 폴 퐁타이에가 샤토 마고 외에 유일하게 컨설팅을 해주었던 와이너리다. 그래서 일부 와인 전문가들은 마르케스 데 리스칼에서 마고와 비슷한 감초향과 후추향 같은 느낌이 난다고 평가한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만드는 여러 와인 가운데 마르께스 데 리스칼 XR은 160여년 전 먼 스페인까지 와서 와인을 빚던 프랑스 양조 전문가들에 대한 헌사다. 당시 보르도 와인 양조가들은 그 해 특별히 뛰어난 와인이 담긴 참나무통에 분필로 ‘XR’이라는 표시를 남겼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 XR 역시 매년 품질이 좋은 와인이 담긴 참나무통을 따로 골라 만든다. 비록 지금은 프랑스산 참나무통이 아닌 미국산 참나무통을 사용하지만, 2년 동안 숙성해 고전적인 중후함을 살렸다.
이 와인은 하이트진로가 수입한다. 올해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레드와인 구대륙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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