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이 열렸다, ‘더 열린 나’를 위해 떠나라 [ESC]

한겨레 2023. 7. 2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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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노동효의 지구둘레길 방랑의 이유
바라나시 일출, 안데스 별똥별…
여행자 인생 바꿔놓을 풍경
‘거대한 타임머신’ 지구 여행
가진 거 없고 젊을수록 좋아
페루 마추픽추 유적을 내려다 보고 있는 브라질 출신 방랑자 가브리엘라. 노동효 제공

여행이 시작되기 전까지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빅뱅! 문을 걷어차고 ‘무(無)’라는 집을 나간 우주는 138억년째 팽창 중이다. 우주에서 여행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다. 태양계를 도는 지구도 시속 11만㎞로 여행 중이다. 지구에 올라탄 모든 생물체도 여행 중이다. 하나의 종에서 또 다른 종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입자, 원자, 생명체 등 다양한 단계를 지나, 여행이 내게로 왔다.

14살의 겨울, 부산이었다. 8년 만에 내린 눈 때문에 질문이 생겼다. ‘난 어디서 왔을까? 결국 어디로 가는 걸까?’ 그 질문 앞에서 학업이든 진학이든 하찮게 보였다. 집을 나가기로 했다. 여행경비를 모으고, 주말이면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 같은 서적이었다. 다시 겨울이 왔다. 크리스마스 날, 가족 중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트럭 운전사가 마산까지 태워줬다. 밤이 깊었다. 미성년이 잘 데는 없었다. 교각 아래 방범초소를 발견했다. 침낭을 깔고 잠을 청했다.

세월이 흐른 후 그 밤이 나를 여행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구 어느 곳에서든 한몸 누일 잠자리가 있다는 것. 그 후 참 많은 곳에서 잠들었다. 이란 국경을 오가는 기차의 우편 화물칸, 지중해를 오가는 선박의 갑판, 동남아 오지의 오두막, 아프리카 소수 부족이 사는 황무지, 파키스탄의 자갈 사막, 남아메리카의 버스터미널.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는 이는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15세기

떠남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주가 있다. 관광, 여행, 방랑. 대략 시공간의 크기로 이들을 구분한다. 한나절 명소를 둘러보는 걸 관광이라고는 하지만 방랑이라고 하진 않는다. 방랑은 긴 시간을 두고 한 나라나 한 대륙 이상을 거니는 행위다. 관광과 방랑 사이에 여행이 존재한다. 많은 이가 ’여행(자)과 관광(객)’을 저마다의 기준으로 구분하곤 했다. 가장 뚜렷한 기준은 당사자의 마음가짐이다. 타인의 구분은 참견에 불과하다. 다만, 여행이 방랑으로 넘어갈 순 있지만 관광이 방랑으로 바뀌진 않는다. 내적 변화는 주로 방랑에서 일어난다. 방랑자의 내적 변화에 대해 명료하게 밝힌 이로는 체 게바라가 있다. 20세기 초 남아메리카를 8개월에 걸쳐 방랑했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글을 수정하고 다듬는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적어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힌두교 성지인 인도 바라나시에서 흐르는 갠지스강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노동효 제공

여행자는 길에서 결정적 순간과 마주치곤 한다. 어떤 마주침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인도 바라나시의 일출, 안데스 위를 지나가는 별똥별, 아프리카 원주민의 춤사위, 북극곰의 눈동자가 여행자의 감정을 뒤흔든다. 여행자는 낯선 풍경이 일으키는 강력한 내적 반응에 지속해서 노출된다. 뇌가 느끼는 시간의 속도도 달라진다, 아이가 된 듯.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살아 있다는 건, 세상에서 아주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생물처럼) 단지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존재할 뿐인 사물에서 스스로를 빛나는 생명으로 바꾸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떠날까? 어디라도 좋다. 가보지 않은 모든 장소가 미개척지다. 어떤 여행자는 공간을 넘어 시간을 여행하기도 한다. 지구는 거대한 타임머신이다. 호기심의 강도에 따라 15세기, 3세기에 닿을 수도 있다. 인류의 모든 발자취가 같은 시간대에 존재한다. 물론 세계 주요 도시만 여행한다면 21세기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문명의 끝자락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기가 펼쳐진다. 초록빛 산이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라오스와 베트남 사이 산악지대로 들어간 적이 있다. 국적 없는 이들이 국경 없이 사는 곳에 닿았다. 오두막엔 대나무 덫으로 잡은 쥐가 화롯불 위에서 훈제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집주인이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음식을 나눠주었다. 이방인의 소식이 퍼졌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른 시간대의 지구에 불시착했다가 인류로부터 환대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의 풍경. 노동효 제공

블록버스터가 아니어도 아름다운

장기간 여행을 위해 대단한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6개월 정도만 벌어도 1년 이상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세계 곳곳에 있다. 우연한 만남과 뜻밖의 행운과 모험이 어우러진 여행을 하려면 오히려 부자 되기를 미루는 게 좋다. 가진 게 많을수록 여행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세계 일주를 꿈꾸는 직장인이 있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란 책을 샀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트레킹하고, 나미브 사막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그레이트 블루홀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소망을 이루기엔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매달 적금을 넣고 매주 로또를 샀다. 운 좋게 1년 지나지 않아 로또 1등에 당첨됐다. 수령금이 50억이 넘었다. 사직서를 냈고 세계 일주 항공권을 샀다. 출국일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항공기 추락, 버스 추락, 조난 등 사고 소식이 떠올랐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세계 일주를 떠나는 대신 도심의 새 아파트를 샀고 대형 티브이(TV) 앞 소파에 앉아 히말라야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잃을 게 적다면 아직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타이에서 영국인 리처드를 만났다. 그는 13개월째 자원봉사와 여행을 하며 방랑 중이라고 했다. 함께 술을 나눠 마시던 중 그가 내게 물었다.

“블록버스터지만 보고 난 후 돈과 시간이 아까운 영화와, 저예산이지만 보고 난 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중 어느 게 좋아?” “블록버스터면서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네가 바라는 영화는 아주 드물어. 난 내 인생이 저예산이라도 보고 난 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같았으면 좋겠어. 어려선 내 인생이 블록버스터 같을 거라고 상상했지만 이젠 블록버스터가 아니란 것쯤은 알아. 그러나 블록버스터만 대단한 건 아니잖아. <어벤져스>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더 멋진 영화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고질라>보단 <그랜 토리노>가 훨씬 멋진 영화라는 건 확실해. 저예산이라도 좋은 각본, 뛰어난 배우로 인해 멋지고 아름다운 영화가 많으니까. 어쩜 여행도 비슷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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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사마이파타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 청춘들. 노동효 제공

인류로부터 받는 환대 ‘청춘의 특권’

떠남은 이를수록 좋다. 60대보다 40대, 40대보다 20대. 어린 나그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푸는 건 인류의 관습이다. 나 역시 스물다섯 즈음 유라시아 횡단 길에서 밥, 술, 심지어 안방을 내주는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 인류로부터 받는 환대는 청춘의 특권이다. 그 외에도 일찍 떠날 이유는 많다. 15년 전이었다. 지인은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에베레스트 등반을 할 거라고 말하곤 했다. 은퇴 후엔 한적한 시골에서 살 거라고도 했다. 당시 그는 서울의 재개발 예정지에 투자했다. 10년이 지나자 가격이 2배로 올랐다. 15년이 되자 5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부동산 가치가 오르는 동안 무릎 연골은 얇아졌고, 세계의 지붕을 향한 열정은 슬금슬금 사라졌다. “입주 후 몇 년만 있으면 아파트값이 2배 오를 것 같아!”라고 말하는 걸 보니 수도권을 떠날 일도 없을 듯하다. 시간은 많은 것을 집어삼킨다. 지금보다 더 젊은 때는 없다, 육체든 영혼이든.

파라과이 엔카르나시온에서 아순시온으로 가는 버스의 2층 맨앞자리(시야가 탁 트여 ‘파노라마뷰 좌석’으로 불린다)에서 찍은 풍경. 노동효 제공

장기간 여행 후엔 어떻게 살까, 걱정하던 이들이 돌아와선 “생을 탕진했다”라거나 “삶이 망가졌다“고 얘기하지 않는 건 신기한 일이다. 대신 새로운 발견을 했다든가, 강렬한 영감을 얻었다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찰스 다윈이 세계 일주 대신 유럽 한구석에 앉아있었더라면 200년 후 그를 기억할 사람은 없었으리라. 페르난도 보테로가, 헤밍웨이가, 비틀스가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 중 상당 부분은 ‘여행하지 않았기에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박물관’ 저장고에 묻히고 말았으리라. 어쩌면 그곳에 당신의 유물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 혹은 발명하지 못한 음악이나 그림이나 생각들이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방랑자는 <파랑새>의 결말처럼 ‘회색 산비둘기가 파랑새였구나!’하는 정도의 각성에 그칠 수 있다. 그는 허송세월한 것일까? 아니. 방랑이 ‘회색 산비둘기’를 ‘파랑새’로 알아볼 줄 아는 시각을 길러준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이 회자되는 이유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파란색뿐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선명해지리라.

2019년부터 연재해 온 ‘지구둘레길’을 마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고 다시 국경들이 열렸다. 마지막 글의 목적은 단지 떠남을 부추기는 데 있다. “왜 굳이 떠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의 말로써 대신하련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폭넓고 건전하며 너그러운 견해는 평생 지구 한 구석에서 지내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지도를 펼치는 순간, 여행이 시작된다.

여행작가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화성으로 떠나기 전 인류 삶과 지구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 여행하는 ‘길 위의 노동자'. ‘지구둘레길’은 작가의 과거 여행을 회고하며 현재적 의미를 톺아보는 여행기다. <남미 히피 로드>, <세계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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