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기들] ③ 뒤늦게 메워진 '출생 사각지대'…남은 과제는
영아 살해죄 폐지하고 일반 살인과 동등하게…70년 만의 형법 개정
전문가 "형량 강화 그치지 말고 사회 안전망도 보강해야"
(수원=연합뉴스) 권준우 기자 = 출생 미신고, 영아살해 등의 문제는 '수원 냉장고 영아시신 사건'을 계기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우리 사회의 오랜 숙제였다.
기존 출생등록 시스템은 병원에서 출산하더라도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태어난 아이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출생신고를 한 달 내에 하지 않으면 과태료 5만원이라는 유명무실한 처벌 규정이 있지만, 이 역시 부모가 미등록 사실을 스스로 밝혀야만 과태료가 부과되고 그게 아니라면 위반 사실을 알 도리도 없는 허술한 구조였다.
살해나 유기 등 영아를 대상으로 한 범죄를 가볍게 보는 사법 체계도 문제였다.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오히려 일반 범죄보다 감형해 준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을뿐더러 낮은 형량이 범죄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이어져 왔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 같은 출생 신고 사각지대는 늦게나마 정비가 되는 모양새이다. 의료기관이 출생 사실을 지자체에 통보토록 하는 '출생통보제' 법안이 내년부터 시행된다. 영아살해 혐의에 대해 살인과 동등하게 최대 사형까지 선고가 가능하도록 형법도 개정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생활고와 원치 않는 임신, 미성숙한 판단으로 영아살해를 저지르는 산모가 여전히 적지 않은 만큼, 형량 강화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들을 보호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까지 논의가 진전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2년간 공전하던 출생통보제, 뒤늦은 속전속결 통과
의료기관이 아이의 출생 사실을 지자체에 통보하게 하는 '출생통보제'는 수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지 불과 9일 만인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2011년 12월 김춘진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에 의해 처음 발의됐다.
이후 18대 국회부터 현 21대 국회에 이르는 동안 비슷한 법안이 십여차례 발의됐으나 사회의 무관심, 보건당국과 의료계 간의 책임 떠넘기기가 반복되며 한 번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런 법안이 최초 발의 12년 만에, 충격적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통과된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의료기관이 진료기록부 등에 출생정보를 기록해 14일 이내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심평원은 이를 산모의 관할 지자체에 통보하고 지자체는 출생신고 여부를 확인해 1개월이 지나도록 신고가 되지 않으면 7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통지한 후 이후에도 신고가 되지 않으면 직권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했다.
인권 단체와 미혼모지원단체 등은 이제라도 출생통보제가 통과된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한다"며 "출생신고를 부모에 떠넘기는 게 아니라 공공기관, 사회에 일부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도 법안 통과 직후 성명을 내고 "의료기관에서 출생한 모든 내국인 아동의 출생 사실이 정부에 통보돼 출생신고가 누락되는 사례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출생통보제가 오히려 출산 기록이 남는 것을 원치 않는 산모들의 병원 밖 출산을 늘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산모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출산할 수 있도록 하는 '보호출산제' 제도가 검토되고 있지만, 양육 포기를 부추기고 아동의 부모 알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논의가 길어지고 있다.
영아 대상 범죄도 일반 살인·유기처럼 최대 사형까지
영아 살해·유기범도 일반 살인·유기범처럼 최대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도 지난 1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시행은 6개월 이후부터다.
이에 따라 영아 살해죄와 영아 유기죄는 폐지되고 각각 일반 살인죄와 유기죄의 처벌 규정으로 각각 대체된다.
형법의 영아 살해·유기 관련 규정이 개정된 것은 1953년 9월 형법 제정 이후 70년 만에 처음이다.
영아 살해죄는 조문 자체가 감경적 구성 요건, 즉 범행 동기나 양육 환경, 경제 상황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일반적인 살인죄보다 가볍게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휴전 협정이 맺어진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치안이 불안하고, 의료기술도 발달하지 않은 법 제정 당시 사회 상황에 맞춰 산모의 인권과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 취지가 사회 안전망이 보강되고 의료기술도 발달한 현재 상황에 부합한다고 보긴 어렵다.
과거엔 영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신고를 늦게 하는 관행이 있었고, 영아 인권에 대한 의식도 미흡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존속살해나 아동학대살해를 일반 살인보다 더 중하게 처벌하는 데 반해, 마찬가지로 직계가족이자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임에도 영아살해를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영아살해죄 폐지 법안 역시 과거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출생 미신고 아동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국회 문턱을 넘었다.
'병원 밖 출산', '외국인 아동' 숙제로 남아…사회 안전망 보강도
이처럼 출산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한 다양한 제도 개선이 이뤄졌음에도 보완할 점은 아직 남아있다.
현 출생통보제는 내국인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 외국인 아동 출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국인 산모가 국내에서 출산한 뒤 아이를 데리고 출국하거나 하는 등의 경우 아이의 생사 여부 확인이 쉽지 않다.
이번 출생 미신고 아동 전수조사 과정에서도 외국인 아동이 상당수 포함됐다. 이들 중에선 아이가 가족과 함께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 경우도 있지만, 행적과 생사가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성명을 통해 "출생통보제 논의에서 외국인 아동의 출생등록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부분에는 아쉬움을 표한다"며 "유엔아동권리위원회 등 다른 국제인권기구도 부모의 국적, 체류자격, 비정규 이주 상태 등과 무관하게 국내 출생 모든 아동이 출생신고가 돼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권고한 바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외국인 아동 출생등록제에 대해 이미 도입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출생통보제로 인해 출산 기록이 남는 것을 원치 않는 산모들의 병원 밖 출산이 늘어날 가능성에 대해선 '보호출산제'가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아울러 영아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 만큼,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산모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끔 사회 안전망을 더 촘촘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범죄심리학자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이 실존하고, 특히 10대 미혼 산모의 경우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 범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처벌이 강화됐다고 해서 곧바로 범죄 감소로 이어지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은 지난 5일 '출생 미등록 아동 보호체계 개선 추진단'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혼모 등 위기 임산부에 대한 지원 강화"라며 "임신·출산·양육 전 과정에서 정부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생활지원, 심리지원 등 필요한 정책 확대를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st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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