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만주 건국대, 조선 엘리트 청년의 탈출구?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7. 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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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8년 5월 개교한 만주국 지도자 양성기관, 조선인 학생 91명 입학
1938년 만주 건국대 개교와 함께 교수로 부임한 육당 최남선. 육당은 이 대학 개설 당시 유일한 조선인 교수였다. 훗날 총리가 된 강영훈은 육당이 이 학교 교수로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건국대에 지원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소련 볼셰비키혁명지도자 트로츠키. 스탈린과 대립하면서 외국으로 떠돌다 암살당했다. '만주국' 설계자 이시하라 칸지는 당초 트로츠키를 '아시아대학' 교수로 영입한다는 구상을 세웠으나, 대학 설립과정에서 배제되면서 무위로 끝났다. /위키피디아

◇'전대미문의 경쟁률’, 만주 건국대 입시

‘25명 선발에 지원자가 천여명’ ‘만주 建大 조선학생 모집에 전대미문의 경쟁률’(조선일보 1937년10월22일)

1937년 가을 치열한 입시 경쟁이 벌어졌다. 여름에 시작된 중일전쟁도 열기를 잠재우지 못했다. 만주에 신설되는 건국대(建國大)가 목표였다. 1938년 5월 당시 만주국 수도 신경(요즘의 장춘)에 들어설 이 대학은 조선과 일본, 만주, 대만, 몽골, 러시아 등 6개 민족을 합해, 모두 150명을 선발할 예정이었다. 조선에서 모집하는 신입생(일본인 포함) 지원은 10월20일 마감했다. 경성에서만 조선인 155명, 일본인 140명이 몰렸다.

12월27일부터 사흘간 수송동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 조선내 지원자 1차 시험이 치러졌다. 신체검사가 첫번째라는 게 특이했다. ‘만주 대륙에서 활동하자면 우선 신체가 건강하여야 하겠스므로 무엇보다도 건강을 먼저 보는 것’(‘입시수난 제일번’, 조선일보 1937년 12월28일)이라고 했다. 응시자 670여명중 90명(조선인 60명, 일본인 30명)을 뽑았다. 경쟁률은 7.4대 1이었다.

이듬해 초 신경에서 2차 시험을 치렀다. 조선인 응시자에겐 시험장까지 왕복 교통비와 숙박료 전액이 지급됐다. 유례없는 대우였다. 2차 시험은 면접이었다. 인문사회, 자연과학, 일반상식과 인성 등 세 분야로 나눠 분야당 15~20분의 면접시간이 배당됐다. 1938년 3월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났다. 조선내 지원자 중 합격자는 11명(일본인 2명 포함)뿐이었다.(‘건국대학 합격자 조선에서 11명’, 조선일보 1938년3월24일)

건국대 입시 경쟁은 이듬해에도 치열했다. 총독부 학무국은 2회 때인 1939년 입시엔 83명을 추천했다. 조선인 57명, 일본인 26명이었다. 최종 합격자는 전년과 비슷한 13명이었다. 조선인은 9명, 일본인은 4명이었다.(‘건국대학 합격자 발표’, 조선일보 1939년1월17일) 두번째 입시의 특징은 경기중 출신이 5명이나 붙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광주,대구,원산, 부산중 출신이 1명씩 붙었다.

1937년 12월27일 경성여자사범대학에서 만주 건국대에 지원한 수험생 1차 시험이 치러졌다. 만주국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건국대는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 의복비까지 무료였다. 한달 용돈까지 지급해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몰렸다. 조선일보 1937년12월28일자

◇학비, 기숙사비 무료…한달 용돈 5원까지

만주 신경(新京)의 신생 대학에 청년들이 목맨 이유가 있었다. 학비가 전액 무료인데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기숙사비도 공짜였다.속옷 이외의 의류는 무료로 제공했고, 월 5원의 용돈까지 지급했다. 무엇보다 졸업 후 만주국 고급 관료의 길이 보장돼 있었다.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건 만주국을 운영할 엘리트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대학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엔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뿐이었고, 그나마 일본인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경성제대 졸업생 가운데 일본인 학생은 전체 졸업생의 66%, 조선인 학생은 34%에 불과했다.

◇조선인 입학생은 91명…전체 학생의 7%

만주 건국대는 최근에야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정희 인천대 교수의 논문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2016)은 건국대 재학 조선인 학생의 현황과 수업 과목, 향후 진로 등 다양한 정보를 알려준다. 만주건국대학재한(在韓)동창회가 펴낸 ‘환희령(歡喜嶺): 만주건국대학재한동창문집’(1986,1988 총 2권)을 자료삼아 조선인 학생들의 지원 동기, 생활 상황 등을 분석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여 존속한 건국대에 다닌 조선인은 약 91명이었다. 전체 입학생 약 1300명 중 7% 정도였다. 일본인과 중국인에 이어 3번째로 많았다. 대만인보다도 약 4배가 많았다고 한다. 1940년 만주국 인구 4320만 중 한족은 85.34%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만주족 (6.2%), 조선인 (3.36%), 몽고인(2.47%), 일본인(1.9%)순이었다. 82만 명에 불과한 만주내 일본인이 건국대 학생의 47%를 차지한데 비해 만주국 인구 91%인 중국인은 37%로 그 다음이었다.

1941년 만주 건국대에 들어간 강영훈 전 총리 . 그는 육당 최남선이 이 대학 교수로 있어서 지원하게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간 강영훈은 해방 후 창군에 참여, 6.25 전쟁에서 싸웠다. 육군 중장으로 퇴역한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

◇'황민화운동 너무 심해 만주로…'

건국대에는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많았다. 경성제대나 사립 전문학교, 일본 유학은 돈이 많이 들었다. 국립인데다 학비, 생활비가 들지 않는 건국대는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2등 국민으로 사는 것보다 만주에서 새 기회를 찾으려는 청년들의 모험심도 한몫했다.

건국대에는 조선인 학생에게 매력적인 인물이 하나 있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이었다. 교과서에도 실린 ‘심춘순례’, ‘백두산근참기’를 쓴 문인이자 ‘3.1독립선언문’ 작성자로 명망높은 거물이었다. 훗날 총리를 지낸 강영훈은 원래 제국대학을 가려다 육당이 건국대 교수로 있는 것을 알고 입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1939년 입학한 김영록도 최남선이 건국대 교수로 있는 게 입학에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기억의 윤색이 불가피한 회고임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인 학생들이 밝힌 건국대 지원 동기엔 진실이 담겨있다. ‘황민화운동이 너무나 심해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졸업하고 상급 학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거의 일본의 고교와 만주로 갔다. 조선에 머무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오창록의 회고 내용이 그렇다. 민족 차별 없는 만주에 가서 꿈을 펼치고 싶었다는 얘기다.

◇군사,무도 훈련 중시…광복후 한국군 창설, 발전에 참여

건국대는 전기 3년, 후기 3년 등 6년제 과정이었다. 전기는 정신 훈련 및 각종 훈련, 일반 과목, 어학과목 시간이 각각 33%, 28%, 39%로 삼분돼 있는데, 특히 훈련과목 비중이 일반 제국대학에 비해 높은 게 특징이다. 전기 2년 1학기엔 매주 월요일 5~6교시, 수요일 3~4교시, 목요일 5,6교시가 군사훈련이었다. 현역 육군 대좌와 보병대위 등 배속 무관이 군사훈련을 맡았다. 분열행진, 사격, 격투 훈련이 실시됐고 글라이더 조종 훈련이 들어간 게 독특하다. 초급 지휘관으로 실제 전투를 이끌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할 만큼 엄격하고 강도높은 훈련이었다고 한다.

조선인학생은 1944년부터 특별지원병, 학도병으로 징집당해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경우가 많았다. 건국대 재학, 졸업생 50명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국가 건설에 참가했다. 특히 군대 창설과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재학 당시 받은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유도, 합기도 등 무도 훈련이 기여했다는 증언이 많았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육사교장과 총리를 지낸 강영훈, 육군참모총장 출신 민기식, 육군 중장 예편 후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정진환, 육군대학 교장을 지낸 박중윤, 육군준장, 튀니지 대사를 지낸 안광호, 육군준장 예편후 주일공사, 스웨덴대사를 지낸 방희 등이 대표적이다. 동완(고려대), 진원중(서울대), 김삼수(숙명여대, 고려대), 김재진(경북대) 등 학계에서 활약한 건국대 출신도 여럿이다. 한홍수(한일은행장), 김영록(재무부 이재국장)처럼 경제계에서 활약한 인물도 있다.

◇트로츠키, 간디, 펄벅 등 교수 영입 구상

만주국 기획자인 일본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石原 莞爾,1889~1949)는 당초 ‘아시아대학’ 설립을 주장했다. 단순한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건설될 ‘동아연맹’을 담당할 엘리트를 양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교수진으로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인도의 간디, 소설가 펄벅, 중국의 후스(胡適), 루쉰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을 초빙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37년 이시하라의 경쟁자였던 도조 히데키가 관동군 참모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시하라는 배제됐다. 학교명도 ‘아시아대학’에서 ‘건국대’로 바뀌었다.

그 결과 건국대 191명 교원 중 외국인은 16명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최남선과 황도연 둘 뿐이었다고 한다. 최남선의 건국대 교수 부임은 대학 설립을 주도한 관동군 참모진의 정책적 판단,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최남선 임용을 ‘’일종의 쇼케이스’로 추진된 이벤트’로 해석했다.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해 2년반을 복역한 전직 반일(反日)운동의 기수이자 ‘불함문화론’을 내건 대표적 지식인 육당의 명망이 대학의 위상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육당에겐 만주국 최고위급 관료에 해당하는 간임관 2등의 대우와 일본 본토 제국대학 교수 월급의 2배에 가까운 4급봉의 월급 720원이 제공됐다. 초임 신문기자 연봉에 가까운 월급이었다.

◇최남선과 황도연

1938년4월 건국대 교수에 부임한 육당은 ‘만몽문화’를 강의했고, 조선민족 연구를 담당했다. 그러다 1942년 9월 건강을 핑계삼아 귀국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수감된 육당은 반민특위 앞으로 참회록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했다. 여기에선 건국대로부터 ‘구축’(驅逐)됐다는 표현이 나온다. 쫓겨났다는 뜻이다.

황도연은 다소 낯선 이름이다. 1938년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나온 수재였다. 졸업 후 조선저축은행 경성본점과 평양지점에 근무하다 건국대 촉탁 강사가 됐다. 조교수까지 승진한 황도연은 해방 후 경성대(서울대 전신) 교수로 있으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경제대책연구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국대안(國大案)에 반대해 월북했다. 이후 내각 부수상 김책의 재정, 통계 관련 보좌관으로 활약하다 중앙통계국 국장을 지내는 등 북한 통계학, 재정학의 수립자로 알려져있다.

건국대학은 김대중 대통령 자서전에도 등장한다. 1999년 나온 김대중 자서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만주의 건국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38쪽)했다는 내용이다. 80여년 전 청년 학생들의 꿈이었던 만주 건국대는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과거가 됐다.

◇참고자료

이정희,’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 제22집, 만주학회, 2016년12월

정준영,’만주 건국대학’이라는 실험과 육당 최남선, ‘사회와 역사’ 통권 110호, 한국사회사학회,2016년 여름

전성곤, 만주 ‘건국대학’창설과 최남선의 ‘건국신화론’, 일어일문학연구 56집2권, 한국일어일문학회, 2006년 2월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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