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말 문화 만든 K직장인들…신세계·롯데百, 미리 들어 본 올 겨울 이야기
지난해 연말 서울 중구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부터 서울중앙우체국 청사까지 약 500m에 이르는 거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롯데와 신세계 두 백화점 본점 외관을 화려하게 장식한 VM이었다.
VM(Visual Merchandising)은 고객을 끌어들이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시각 연출을 뜻한다.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 직장인들을 VMD라고 부른다.
신세계와 롯데 두 백화점 본점은 화려한 외관 VM으로 지난해 연말의 서울, 특히 관광객이 몰리는 명동 일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새로운 연말 문화를 일궈낸 두 백화점의 VMD들은 올해 초부터 이미 올겨울에 선보일 프로젝트 작업이 한창이다. 뜨거운 여름에 이들을 미리 만나 ‘겨울 이야기’를 들었다.
K-직장인의 연말 프로젝트가 랜드마크가 됐다
서울 명동 일대 백화점의 연말 VM이 화제가 된 건 2021년 신세계백화점이 시작이었다. 당시 신세계백화점은 본점 외벽에 설치된 140만개의 LED 칩을 화면 삼아 ‘Magical holiday’(마법 같은 연말연시)라는 주제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영상을 선보였다. 건물 외벽(파사드)에 미디어 기능을 부여한 ‘미디어 파사드’였다. 미디어 파사드는 신세계백화점이 2019년부터 선보인 VM인데, 2021년에 유례없는 화제를 일으키며 신세계백화점 본점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한국은행 앞 사거리로 인파를 불러 모았다.
이 미디어 파사드는 유나영 팀장이 이끄는 신세계백화점 VMD팀 작품이다. 유 팀장은 2014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하면서 처음 VMD를 맡게 됐다. 그는 디자이너 출신이 다수인 VMD 중에는 특이하게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인테리어 업체에서 오피스 사무실과 병원 등을 설계하다 늘 관심이 많았던 상업 공간을 다루기 위해 몇 차례 이직과 유학을 거쳤고, 신세계백화점에 오게 됐다. 유 팀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갔던, 다양한 상품으로 채워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 매료됐던 기억이 선명했다.
VM은 인테리어와 공간을 다룬다는 점은 같지만, 인테리어가 공간을 구획하고 나눠 하드웨어를 설계하는 것이라면, VM은 공간을 채우고 꾸미는 소프트웨어를 고민한다는 점이 다르다. 유 팀장은 풍부한 인테리어 설계 경험과 감각을 살려 금세 일을 배웠고 다른 매장을 참고하고 각종 잡지를 뒤지며 계속 공부를 이어갔다.
연말은 VMD들이 갈고닦은 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시기다. 연말 VM은 백화점에서 진행하는 VM 프로젝트 중 가장 규모가 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연말의 백화점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포근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진다. 2021년 VM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지만, 처음부터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직장인들이랑 같았어요. 직장인들이 갑자기 ‘대단한 걸 해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전보다 더 나은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같은 게 있었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회의를 거듭하며 VMD팀이 생각해 낸 주제는 ‘서커스’였다. 휴 잭맨이 주연한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처럼 관객을 끌어 모으고 압도하는 서커스 공연 같은 효과를 내려고 했다. 본점 정문을 중심으로 날개처럼 펼쳐진 건물 외벽에 광고판을 없앴고, 시선이 모이는 중앙을 서커스 천막처럼 꾸며 몰입감을 더했다.
신세계백화점이 미디어 파사드를 강조한 것은 본점의 위치적 특성을 최대한 반영한 결과다. 본점 건물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이기에 외관을 자유롭게 바꾸기 어렵고, 백화점 앞 보도가 좁아 행인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길 건너 서울중앙우체국 청사나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분수대에서 한눈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데 미디어 파사드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미디어 파사드가 공개된 2021년 말은 코로나19가 정점으로 향해 가던 시기였다. 유통업계도 위축됐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한층 화려해진 신세계백화점의 VM이 연말 분위기를 한껏 즐길 수 없었던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당시 VM에는 ‘고객을 위로한다’는 콘셉트도 있었는데 제대로 통한 셈이었다.
신세계백화점은 2021년 성공에 이어 지난해에는 전보다 더 많은 350만개의 LED 칩을 활용해 마법의 성처럼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를 선보였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중앙우체국 청사 앞은 전년에 이어 교통 통제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화려한 인증 사진이 무수히 쏟아졌다.
아쉬움을 장점으로
2021년 신세계백화점의 미디어 파사드를 주목했던 이들 중에는 직선거리로 400m도 떨어지지 않은 롯데백화점 본점의 VMD도 있었다. 롯데백화점 본점도 당시 VM을 공개했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롯데백화점의 VMD팀 직원들은 ‘우리도 보여주겠다’며 2022년을 더욱 열심히 준비했다.
롯데백화점 본점의 지난해 말 VM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은 건 VMD팀의 윤호연 책임이었다. 윤 책임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 후 롯데백화점에 입사한 15년차 직장인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VM을 맡아온 베테랑이다. 그동안 해외 유명 디자이너를 초빙해 함께 작업하거나 신규 매장의 VM을 관리하는 등 오랫동안 VM을 전담하며 경험을 쌓아왔다.
윤 책임은 어린 시절 잠실에 문을 연 롯데백화점과 롯데월드를 방문했을 때의 이미지가 아직도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다고 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백화점과 아름다운 ‘아이스링크’의 모습들이 롯데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남겼다.
롯데백화점이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보여줘야 할 이미지들을 점검하면서 윤 책임은 팀원들과 함께 어떤 요소를 살려야 할지 고민하고 회의하며 지난해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눈에 띈 게 그동안 아쉽게 여겨졌던 롯데백화점의 위치적 특성이었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백화점 정면이 차도인 남대문로와 인도가 접한 연도형 구조라는 게 특징이다. 도보로 입구까지 걸어와야 하는 게 늘 아쉬운 점으로 꼽혔는데, VM에 이런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면 오히려 장점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을지로입구역 출구부터 도보로 이동하게 되는 100m 정도의 거리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화려하게 꾸몄다. 백화점 쇼윈도에도 아기자기한 장식을 더해 디자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길 건너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도 멀리서 바라보며 즐길 수 있게 3층 높이 대형 구조물을 올리고 크리스마스 트리와 조명으로 꾸며냈다.
윤 책임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영화제 시상식장 입구처럼 빨간 커튼으로 꾸민 정면의 방풍문이다. 이 밖에도 곳곳에 눈에 띄는 다양한 연출로 ‘포토존’을 늘렸고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몰렸다. 연말 VM이 다시 환영 받으며 소공동 1번지의 롯데백화점 본점은 명동의 터줏대감으로서 존재감을 나타냈다.
K-직장인이 만든 새로운 연말 문화
지난해 두 백화점의 연말 VM은 코로나19 방역 조치 대부분이 해제된 뒤 처음 맞는 연말의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해줬다. 두 백화점이 있는 명동 일대는 예전부터 외국인 관광객이 주로 찾는 곳이었지만 내·외국인 가리지 않는 연말 ‘핫플’(명소)이 됐다.
인접한 공간에서 연말 VM이 관심을 받자, 업계 선두를 다투는 두 백화점이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VMD들은 서로의 작업을 보며 같은 일을 하는 직장인으로서 동지애를 느낀다고 했다.
VM 작업은 인테리어 공사처럼 현장을 관리해야 하고, 시각적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체력과 창의력이 모두 필요한 작업이다. 특히 연말 VM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매일 야근이다. 직장인들이 늘 꿈꾸는 ‘칼퇴’나 저녁이 있는 삶은 어렵다. 비슷한 일을 하는 이들의 처지와 고민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연말에는 백화점 영업이 끝난 뒤에야 VM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야근이 이어지는데, 새벽까지 불 환하게 켜진 곳은 인근에 롯데랑 신세계 두 곳뿐이더라고요. 얼마나 고생했을지 서로 뻔하죠.” 윤 책임은 지난해 회심의 연말 VM을 준비하면서도 신세계의 준비 모습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완성된 결과물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세계의 VM은 본점 건물의 특성을 장점으로 잘 삼은 것 같아요. 미디어 파사드에 집중해서 그 안에 담긴 콘텐츠도 잘 구현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유 팀장도 롯데백화점의 VM 작업을 지켜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준비하는 과정을 봤는데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겠더라고요.” 롯데백화점의 VM을 준비 과정 중이나 완성된 이후에도 직접 가서 보았다고 한다. 자신만의 색깔을 풀어내는 방식이 눈에 띄었다. “완성된 모습을 보면 쇼윈도를 활용하면서도 웅장하고 클래식하면서 친근하고 아기자기한 접근 방식이 좋았습니다.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롯데답게 잘 풀었다고 느꼈어요.”
백화점의 VMD에겐 연말 VM이 가장 핵심적인 업무 중 하나지만, 평소에도 지하 식품 매장을 꾸미거나 새로 문을 연 매장을 관리하고 계절에 맞는 VM을 준비하는 등 일상적인 업무도 늘어서 있다. 그런 중에도 두 백화점의 VMD들은 최선을 다하며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수준 높은 결과물을 선보였다. 결국 새로운 연말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들의 직업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중이다.
“저희 일이 무척 힘들고 협의해야 하는 유관 부서도 많고, 그렇다고 월급이 더 많은 것도 아니지만, 프로젝트를 끝마쳤을 때 그동안 기획하고 실행해 온 결과물을 보면서 느끼는 성취감이 아주 큽니다. 직장인이 할 수 있는 업무로서는 독특한 점인 것 같아요.” 윤 책임이 말했다. “SNS에 즉각적으로 공유돼 긍정적인 반응을 보는 것도 큰 힘이 됩니다.”
유 팀장도 비슷하다. “프로젝트를 마치면 후배들도 엄청 큰 자부심을 느껴요. 다른 곳과 이기고 지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외부에서 VM 대결에 이겼다거나 졌다고 하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백화점마다 특징과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만의 색깔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VMD팀의 ‘K직장인’들은 올 연말 VM 콘셉트를 이미 결정하고 한창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유 팀장은 지난 성공으로 연말이면 큰 관심을 받게 돼 담당자들의 부담도 커졌다고 했다. “엄청 부담스럽죠. 매일 아침 커피를 사 오는 빵집이 있는데, 그곳 사장님도 ‘올해 (본점 VM) 콘셉트는 뭐예요’ 하고 물어볼 정도니까요”라며 웃었다. 유 팀장은 신세계의 올해 VM에 대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한 편의 짧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윤 책임도 연말을 위해 팀원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 관광객이 더 많아질 텐데, 한 해 동안 공들여 준비하는 작업을 멋지게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벌써 듭니다.” 롯데는 올해도 지난해처럼 아날로그 감성이 담긴 VM을 준비해 고객과의 소통을 이어가겠다는 계획이다. 윤 책임은 “크리스마스라는 시기적 특성을 더 잘 보여주면서 ‘모두의 희망과 바람을 응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는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로 소개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버티컬 채널입니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 이들과 영감을 나눕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