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헛점 많은 AI 번역이 가르쳐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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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 관련 일을 하는 지인이 얼마전 흥미로운 부탁을 해왔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를 통해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문장이 어떤지 봐달라는 것.
통번역 분야에서 AI 접목이 가져온 변화를 분석해 보면 정보를 매개로 하는 다른 분야의 업무 변화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출중한 실력을 갖춘 숙련된 소수의 '톱 클래스' 통번역 전문가들이 AI와 협업해 고수입을 올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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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 관련 일을 하는 지인이 얼마전 흥미로운 부탁을 해왔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를 통해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문장이 어떤지 봐달라는 것. 관심 있는 주제기도 해서 시간을 내서 찬찬히 들여다봤다.
처음 결과물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인간 번역가가 한 것이라고 해도 의구심이 들지 않을 만큼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문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영어 원문을 비교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헛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많이.
가장 두드러진 약점은 단어 선택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선체가 좁고 긴 바이킹의 전함 longship을 ‘롱십’이라고 했다가 불과 몇 줄 아래는 ‘전함’이라고 하더니 다음 페이지에선 ‘범선’이라고 번역했다. Grand Canyon은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했다가 바로 다음 문장에선 ‘그랜드 캐년’으로 썼다. Crane의 번역은 ‘두루미’와 ‘크레인(기중기)’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문장 속 단어를 빼먹거나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probably(아마도)를 빼먹고 단정형으로 번역하는가 하면, square를 ‘정사각형’이 아닌 그냥 ‘사각형’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중국의 화성 탐사용 로봇차(로버) Curiosity를 ‘호기심’으로 번역한 건 애교로 봐주기로 했다(검색하는 수고도 귀찮은 게으른 학생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 바로 윗 문단에서 목성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어진 The planet isn’t like ours(목성은 우리가 사는 지구와 다릅니다)를 ‘지구는 우리와 다릅니다’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자신감의 근거는 알 길이 없다.
관용구나 숙어를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항해하는 배 위에서 익숙하게 걸을 수 있게 되다’라는 뜻의 get one’s sea legs를 ‘바다 다리를 얻다’라고 번역한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뜻의 Rise and shine은 ‘일어나 빛을 발하세요’라고 번역했고, to figure this out(이 것을 알아내기 위해)은 ‘용모를 알아내기 위해’라고 풀었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세 종류의 생성형 AI 서비스로 각각 번역한 결과물을 살펴봤는데, 실수의 유형은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엉성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언급해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보면 어려운 문장을 깔끔하게 잘 번역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전체적인 번역 작업을 온전히 AI에게 맡기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생성형 AI의 성능이 더 많이 개선된다고 해도 최적화 도구(optimization tool)인 AI의 특성상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AI는 뭐든 잘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학습(머신러닝)’해야 한다. 하지만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확률적으로 구현한 ‘최적’이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맞아 떨어지는 ‘최상’일 순 없다. 인간 전문가의 관리·감독이 필수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전문적인 통번역의 세계에서 대수롭지 않은 오역이라고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교나 비즈니스 협상에서 통번역 과정의 작은 실수는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통번역 분야에서 AI 접목이 가져온 변화를 분석해 보면 정보를 매개로 하는 다른 분야의 업무 변화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크게 세 가지다.
1. 의미 파악 정도 목적을 위해 존재했던 초벌 번역 시장은 사라질 것이다(이미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2. 출중한 실력을 갖춘 숙련된 소수의 ‘톱 클래스’ 통번역 전문가들이 AI와 협업해 고수입을 올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
3. 특정 직업군에 속하는 것만으로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같은 직업군 안에서 톱클래스의 실력과 경쟁력을 인정받는 게 과거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생성형 AI 기술의 발전과 확산의 장기적인 부작용으로 우려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이 생성형 AI를 닮아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흔히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 같은 작품도 번역자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달라질 수 있다. 똑같은 문장이라도 상황에 따라 직역에 가깝게 번역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의역에 더 무게를 둬야 하는 경우도 있다. 고민의 결과물인 적절하면서 감칠맛나는 번역은 AI가 따라하기 어렵다. AI는 인간번역가가 그렇게 해놓은 걸 끄집어쓸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 늘 들어맞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최적화 방식을 따르는 AI식 번역에 너무 익숙해지면 자칫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고민하는 수고를 점점 덜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면 번역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AI 번역 수준으로 하향평준화 되면서 개성 없고 재미도 없는 ‘B급 번역’만 가득한 세상에 살게될지도 모른다. 이 또한 번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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