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설렌다, 여자월드컵
얼마 전부터 엄지발가락 주변에 찌릿한 통증이 간혹 있었다. 병원에 갔더니 무지외반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증상이 심하지 않으니 당장 수술이나 약처방은 필요 없다며 일상생활에서 주의할 점을 자세히 안내했는데 슬프게도 콕 집어 축구를 말리셨다. 꼭 맞는 신발, 많이 걷고 뛰는 것, 엄지발가락에 무리가 가는 급격한 방향전환 등 의사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모든 것이 축구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그날 저녁에도 연습모임을 잡아두었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풋살이 요즘 나의 유일한 낙이라며 애원해 보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웃을 뿐이었다.
어른이 되고 유일한 장점은 남의 말을 좀 안 들어도 된다는 게 나의 신조지만 이 통증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좀 무섭기는 하다. 당장 교정기를 주문하고, 넉넉한 사이즈의 풋살화를 다시 구했다. 무엇보다 당장은 풋살 모임에 좀 쉬엄쉬엄 참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마음을 달래줄 빅이벤트가 마침 열리니 이 끓는 욕구는 아쉬운 대로 남의 경기를 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이번 여자월드컵은 여러모로 주목을 받고 있다. 32개국이 참여하는 큰 규모로 북반구 아닌 남반구에서 열리는 첫 대회인 데다 최강 미국팀을 이끄는 라피노의 마지막 월드컵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이 높다. 우리 팀 역시 지소연 선수를 비롯해 월드클래스 레벨을 경험한 이른바 황금세대가 총출동하는 데다 8강이라는 역대 최고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 더욱 기대감을 높인다. 여자월드컵은 과연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까. 궁금하고 설렌다. 어떤 명장면이 나오고, 또 어떤 슈퍼스타가 탄생할까.
그동안 여자 프로선수들은 같은 종목의 남자 선수들에 비해 연봉을 비롯한 보상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이 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경제를 모르고 마케팅을 모른다는 조롱이 돌아왔다. 스타 선수가 없고 관객이 없는데 어떻게 대우를 해주냐는 논리였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 여자배구가 역대급의 관객몰이를 하며 현장 관중과 시청률을 동시에 잡자 더 이상 경제학 운운하며 핑계를 대기 어려워졌다.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고, 이제는 여자팀과 선수들에게도 적극적인 보상과 지원을 할 것이다’라는 당연한 선언이 이제부터라도 더 쏟아져야 한다. 실제로도 더 이상 꿈에서나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미 현실로 왔다.
지금 이 순간 미국팀은 성별과 관계없이 동일한 대우를 보장받는 첫 번째 월드컵을 치르고 있다. 험난한 소송 과정을 끌어온 여자 선수들은 축구사에서는 물론, 여성사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렇게 멋진 언니들이 본업에서 보여줄 화려한 모습을 생각하면 크게 설렌다. 혹시 아직도 ‘그래도 여자축구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이라이트 영상 시청을 조용히 권하고 싶다. 상대 플레이어 사이를 기가 막히게 가로지르는 패스,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승부차기와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프리킥을 보고 있자면 누구라도 경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볼 게 없는 것이 아니고 본 적이 없을 뿐이다. 여자축구의 즐거움을 아는 자들이여, 함께 축제를 즐깁시다. 아직 맛보지 못한 이들이여, 놀라운 즐거움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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