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5300년 만의 조문객
이탈리아 볼차노에는 사우스티롤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 도시에 들렀다가 박물관을 찾았더니 어린 학생을 비롯한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외치(Otzi)라는 이름이 붙은 단 한 사람을 보기 위해 여기 왔다. 박물관 전체가 외치씨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1991년 독일인 헬무트 지몬과 에리카 지몬 부부는 이 부근의 해발 3200m 지점을 등반하다가 외치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외치씨가 산악인 희생자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는 피라미드보다도 나이가 많은 5300년 전의 청동기인임이 밝혀졌다. 얼음 덕분에 피부의 탄력은 물론 피부에 새겨진 문신, 옷과 도끼, 장신구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현대의 법의학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외치씨가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연도 규명했다. 그 긴 세월 얼마나 외로웠을까. 2016년에는 외치씨의 음성까지 복원되었다.
박물관 안은 조용했다. 외치씨는 나를 비롯해 관람객들이 조문한 가장 나이 많은 고인인 셈이다. 전시물은 수천 년 전의 끔찍한 범죄를 상세히 알려주면서 어린이도 이해하기 쉽도록 다양한 시각자료를 배치해두고 있었다. 전시를 따라가니 자연스럽게 범죄 피해자 외치씨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2층 전시실에는 그의 미라를 직접 보는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치된 냉장실에는 작은 유리문이 있어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를 볼 수 있다. 내 바로 앞 차례는 세 어린이를 동반한 엄마였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외치씨의 슬픔을 차분히 되짚어 말해주었다. 가장 어린 막내가 관람대에 섰는데 키가 작아 그를 볼 수 없었다. 나는 저 아이의 관람을 도와주어야 하나, 많이 어린데 실물의 시신을 보여줘도 될까 아주 잠시 생각했다. 그때 세 자매 중 큰언니가 버튼을 눌렀다. 관람대가 움직이며 발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섯 살 어린이도 잘 볼 수 있도록 설계된 받침대였던 것이다. 막내 관람객은 그렇게 외치씨를 만났고 짧은 추모의 말을 남긴 뒤 관람대에서 내려왔다.
억울한 슬픔에는 내일이 필요하다. 내일은 떠난 이가 밝히지 못한 진실을 해명해주기도 하고 그의 훼손된 명예를 되찾아주기도 한다. 모든 조문은 너무 늦은 행위이지만 그래도 떠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려는 남겨진 이에게 조문은 귀중한 절차다. 고통을 목격하고 그 감각을 배우는 것은 어른에게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애도는 자신의 삶을 위한 다짐이기도 하기에 필수적이며 어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배려가 필요할 수 있겠지만 그 경험에서 어린이를 배제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뜻밖의 슬픔을 겪으면서 찾아올 기쁨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애도에 꼭 필요한 것이 더 있다. 시간과 방향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 중 가장 더디게 찾아오는 것이 슬픔이어서 애도는 서두를 수가 없다. 겪어낼 시간을 주지 않았을 때 슬픔은 존재를 무참히 부수거나 아예 감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이시켜버린다. 슬픔이 어두운 위력을 갖는 것은 이런 부분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보았다. 슬픔으로 부서져버리거나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우리의 어린이들이 그 어느 쪽이 되는 일도 바라지 않는다. 조문에는 방향도 있어야 한다. 무엇을 왜 슬퍼하는지,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선명하게 알아야만 슬픔의 되풀이를 막는다.
고고학자들은 30년 넘게 외치씨 죽음의 진실을 파헤쳤다. 다섯 살 어린이는 그 앞에서 묵념했다. 발령 2년차 초임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기리는 조문의 시간이 오후 4시까지라는 공고를 보았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자신의 자녀에게 조화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학부모의 글을 보았다. 슬픔을 모르게 키우고 싶은가. 그건 사람을 기르는 방식이 아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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