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심박기 투혼’ 신구…열정적인 ‘라스트 댄스’

유주현 2023. 7. 22.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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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연극 ‘라스트 세션’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해 불꽃논쟁을 벌이는 2인극 ‘라스트 세션’에서 프로이트 역을 맡은 배우 신구(오른쪽)와 C.S.루이스 역을 맡은 배우 카이(왼쪽). 남명렬과 이상윤이 각각 더블캐스팅으로 출연한다. [사진 파크컴퍼니]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죽음 문턱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고백이 많다. 평생 자유롭게 살다가 죽음 직전에 세례를 받고 평화를 얻는 사람도 꽤 있다. 죽음이란 인간의 정신을 이토록 간단히 뒤집어 놓는 두렵고 강렬한 개념이다.

프로이트, 20세기 대표적 무신론자

그런데 일평생 인간의 정신을 연구해 신 대신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종교의식도 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20세기 대표적인 무신론자로서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일관되게 지켰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 한줌의 의심도 없었을까. 프로이트도 인간인데, 죽음 앞에서 조금은 흔들리지 않았을까.

연극 ‘라스트 세션’(대학로TOM 1관, 9월 10일까지)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된다. 기독교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자 신학자이기도 했던 C.S. 루이스(1898~1963)와 프로이트의 가상 만남을 주선한 2인극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지성의 불꽃튀는 논쟁으로 ‘신의 존재 유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에 다가가는 시도로 보인다. 루이스 역시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회심한 인물이기에, 그 계기를 프로이트가 궁금해 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35년 이상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세계관을 비교하는 강의를 해 ‘하버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강좌’로 평가받았다는 아맨드 니콜라이 교수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대논쟁』을 바탕으로 미국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쓴 희곡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을 무대화했다. 2010년 뉴욕 초연 후 영국·스웨덴·스페인·호주·일본 등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2020년 초연, 22년 재연에서 평균 객석 점유율 95%를 기록했고, 올해 삼연(三演)도 전석 매진 행렬 중이다.

새로울 건 없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티키타카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흔한 2인극 형식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연극의 존재의의를 되묻는 온갖 실험이 난무하는 가운데, 어쩌면 고전적인 2인극이야말로 가장 연극적이면서 지적인 방식으로 자체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형식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무대다.

초연부터 프로이트 역을 맡았던 신구(86)가 “모여서 대본을 계속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오랫동안 토의를 해도 쉽게 답이 안 나오는 부분들이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쉽지 않은 내용이다. 인공심박기에 의지하면서도 “마지막 작품일 수 있다. 죽기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제대로 한번 남겨보고 싶다”며 욕심껏 무대에 선 그가 90분간 쉼없이 이어지는 논쟁을 소화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극중 마른기침을 하거나 병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은 연기인지 실제상황인지 헷갈릴 정도로 리얼하고, 그 숭고한 열정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한 날, 구강암 악화로 죽음을 앞둔 프로이트의 진료실에 옥스퍼드대학의 젊은 교수이자 유명 작가인 루이스가 찾아온다. 루이스는 자신의 신간에서 프로이트를 비판한 탓에 불려왔다고 생각하지만, 프로이트는 그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왜 신을 믿는가.

여기서부터 모든 인간을 둘로 가르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팽팽한 대립이 전개된다. 무릇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논쟁 양상은 다르게 흘러간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반유대주의로 인한 정신적 고통, 딸과 손자의 갑작스런 죽음, 16년간 암투병으로 인한 고통 등 프로이트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직관적이다. ‘신이 있다면 선한 자들의 고통과 불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라는 주장이다.

하버드 교수 강의 바탕으로 만들어

반면 루이스가 신을 믿는 이유는 아리송하다. 루이스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불화 등으로 신앙 교육에 거부감을 느껴 무신론자가 됐지만, 어느 날 형이 모는 오토바이에 달린 사이드카를 타고 가다 어떤 생각이 스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걸 믿게 됐으며, 이후 체스터튼의 『영원한 사람』 중 소년과 거인의 우화, 친구인 톨킨과의 대화 등에서 골고루 영향을 받았다. 루이스에게 ‘고통이란 인간이 잘못을 깨닫고 행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죽음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되찾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이런 성직자 같은 논리에 프로이트는 “그래서 히틀러가 망치를 휘두르는 동안 신은 그 망치질에 누가 살아남을지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일갈한다. 역시 명쾌하다.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승리는 아니다. 중요한 건 신의 존재를 놓고 논쟁하는 도중 지나가는 해프닝처럼 언뜻언뜻 보여지는 두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공습경보가 울리자 두 사람은 함께 피신할 방법을 찾고, 보철기로 인한 프로이트의 고통을 루이스가 쩔쩔매며 덜어준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의 불장난처럼 닥친 비극과 불행을 수습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라는 얘기다.

음악에 관한 논쟁이 결정적이다. 전쟁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 프로이트는 라디오를 수시로 켰다가 음악이 나오면 바로 꺼버린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답게 “이유를 알 수 없이 감동 상태로 몰고 가는 음악에 저항감이 생긴다”는 프로이트에게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는 루이스는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시는 것 같다”고 비아냥댄다. 논쟁의 정점에서 한바탕 보철기 소동이 벌어지고, 루이스가 떠난 후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막이 내리면,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한 90분간의 논쟁이 다 헛소동임을 깨닫는다. 이 연극으로 인해 무신론자가 갑자기 신을 믿게 될 일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다만 전쟁이라는 극한대립이 시작된 시점에 상반된 입장을 가진 두 석학이 기어코 만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는 설정에 방점이 찍힌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는 있다는 데 구원이 있다. ‘사람이 먼저’라는 얘기다. 2인극이라는 형식이 품을 수 있는 최고의 내용 아닐까 싶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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