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예능서 호평 악역 3인방 팬데믹 상황이 끝나면서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 봇물처럼 밀려오고 있다. 여행 장소도, 출연진도 버라이어티하다.
지난해 말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 기안84의 극한 세계일주’를 테마로 남미 여행을 다녀온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MBC)는 올해 인도를 무대로 시즌2를 방송했고 분당 시청률 9.2%까지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두발로 티켓팅’은 뉴질랜드의 장엄한 자연을 배경으로 하정우·주지훈·최민호·여진구 등 꽃미남 4인방의 여행기를 펼쳐냈다. ‘아주 사적인 동남아’는 캄보디아와 태국을 여행하며 선후배 사이인 배우 이선균·김도현·김남희와 영화감독 장항준의 아기자기한 케미를 담아냈다. 통통 튀는 아이돌 스타 4인방과 스타 예능PD 나영석의 ‘뿅뿅 지구오락실’ 역시 태국에 이어 핀란드·발리까지 시즌2로 이어지며 발랄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집에서도 전 세계를 누빌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의 관건은 ‘누구와 함께하는가’이다. 목적지가 어디든 여행은 동행자에 따라 추억의 결이 다르게 남는다. 그런 점에서 중년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프로는 반갑다. 미처 몰랐던 그들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묘미에다 중년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적인 악역 전문 배우 3인방 진선규·박지환·허성태의 여행 예능 출연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본캐’의 매력 덕분에 신선했다.
세 사람은 영화 ‘범죄도시1’에 나란히 출연했다. 중국 교포 출신의 각기 다른 범죄조직 우두머리를 맡았던 세 사람의 ‘악의 포스’는 영화가 흥행하는 데 훌륭한 견인차가 됐다. 영화 속에서 세 사람 모두 민머리로 출연했는데 그 살벌한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던 이들이 여행 예능에서는 모두 ‘소녀 소녀’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일단 비주얼 면에서 신선할 수밖에 없다.
‘텐트 밖은 유럽’에 출연한 진선규와 박지환은 지난해 여름 스위스·이탈리아에 이어 올해 얼음왕국 노르웨이까지 다녀왔다. 진선규는 팀의 맏형인 배우 유해진의 짓궂은 아재개그에 늘 당하면서도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좋은 동생’의 모습을 보여줬다. ‘범죄도시1’에서 손도끼로 머리를 밀던 ‘위성락’ 캐릭터는 온데간데 없고, 시종일관 모든 풍경과 상황에서 “예쁘다” “좋다”를 연발하는 그에게는 ‘꽃선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특히 아내(배우 박보경)와 전화통화를 할 때는 “여보, 여보옹~” 콧소리를 내는 사랑꾼의 모습까지 발휘했다.
박지환 역시 대부분 악에 받친 캐릭터를 많이 한 탓에 그의 본캐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청자의 눈도장을 받았던 드라마 ‘그대안의 블루’에서도 그는 화가 나면 길거리에서 옷을 벗어 제끼는 다혈질의 거친 사나이였다. 그런데 여행 예능에서 보여준 박지환은 시인 감성을 지닌 ‘낭만 캠퍼’ 그 자체였다. 캠핑할 때 비가 오면 어떡하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텐트 안에서 빗소리 듣는 게 얼마나 힐링인데요”라며 “텐트 밖은 유럽, 텐트 안은 내 우주”라고 답한다. 대자연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는 진선규에게 불쑥 “멋있으니까 한 번 안을래?”라며 누구도 예상 못한 제안을 한다. 촬영 때문에 며칠 먼저 귀국해야 하는 진선규가 마지막날 밤 오로라를 볼 수 있도록 “제가 이틀 정도 덜 살아도 되니 하나님 부처님 모든 신들(?)님, 우리 선규형이 오로라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귀여움도 발산한다.
한편 ‘부산 촌놈 in 시드니’에 출연한 허성태는 시종일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행보다는 ‘워킹’에 방점을 찍은 이 프로에서 허성태의 업무는 카페 바리스타. 난생처음 커피 머신을 다루게 된 그는 나이 어린 사수 바리스타 에스더에게 항상 깍듯이 대하며 성실하게 업무를 배워나간다. ‘오징어 게임’에서 배신을 밥 먹듯 하던 ‘101번 장덕수’는 없고, 매일 아침 동생들(이시언·배정남·안보현·곽튜브)의 아침상을 차려내며 ‘허머니(허성태+어머니)’로 등극했다. 어찌됐든 예능 프로인데 농담 한 번 할 줄 모르고, 대본 외우듯 커피 메뉴 외우기를 반복하는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심심해 보였지만 그 성실함과 진지함에 어느새 응원을 보내게 됐다.
종합해보면 이들 악인 3인방의 여행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40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겨우 얼굴을 알린 무명배우 출신들이다. 그래서일까, 이들에겐 남을 위한 ‘배려심’이 몸에 뱄다. 누구하나 나대질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리고 연신 소녀처럼 “예쁘다” “재밌다” “좋다” “행복하다” 감탄사를 쏟아내며 모든 것에 감사한다. 선택하기보다 선택받아야 생존이 가능했던 이들이 악역에서 무장해제 된 뒤 보여준 여린 모습들에서 여행보다 일이 먼저였던 중년 세대의 짠한 과거가 오버랩된다.
무엇보다 방송 내내 이들이 듣고 따라 부르던 1980~90년대 노래들에선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세대의 아련한 청춘의 추억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그리고 아재들은 왜 그렇게 눈물이 많은지. 부활의 ‘네버 엔딩 스토리’ 가사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을 따라 부르다 홀로 눈물을 훔쳐내는 허성태를 보며 아마도 많은 시청자들이 함께 눈물을 흘렀을 터. 비록 방구석 여행이지만 이들 악역 3인방이 보여준 뜻밖의 낭만 감성은 ‘내 이야기인 듯’ 많은 중년들에게 힐링과 추억을 선물했다. 시청률은 저조해도 역시 어른들의 여행에는 같은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촉촉함이 있다.
이제 곧 새로운 중년들의 여행이 시작된다. 76년생 용띠 친구들, 김종국·장혁·차태현·홍경민·홍경인과 강훈이 몽골로 떠나는 ‘택배는 몽골몽골’과, ‘차줌마’ 차승원과 ‘노안’ 김성균이 고대 문명 탐사를 떠나는 ‘형따라 마야로’다. 수줍음 많은 악인 3인방과는 달리 수다스럽고 시끄러운 중년들의 여행은 어떨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