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이광 필봉에 반한 장제스, 국민당 기관지 주필 맡겨

2023. 7. 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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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3〉
샤쥔루의 부친은 ‘큰 사고 칠 놈’ 이라며 인하이광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가출한 샤는 대만행 마지막 배에 올랐다. 대만대학 농학과 졸업 후 인하이광과 결혼했다. [사진 김명호]
1950년대와 60년대, 대만에는 대륙에서 명성을 날리던 지식인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중 가장 저명한 인물 한 명만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후스(胡適·호적)였다. 영향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천하의 후스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엔 미치지 못했다.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이름만 나란히 했다.

1949년 말 국민당은 대륙에서 실패했다. 대만천도 후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한쪽은 전제(專制)에 철저하지 못했다며 보다 강력한 1인독재를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정반대였다. “자유와 민주를 너무 억압했다. 말로만 혁명과 진보를 외쳤다. 국민이 우리를 버렸다. 철저한 반성이 먼저다.” 반성을 주장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호응도 기대 이하였다. 반성에 성공한 사람이 인하이광이었다.

인하이광의 제자 한 명이 스승의 성공 원인을 글로 남겼다. “선생의 강의는 문장만 못했다. 문장도 한가하게 차 마시며 나누던 한담 내용만 못했다. 한담도 강연만 못했다. 강연은 재기가 번득거렸다. 감성 색채가 농후한 이성의 설파였다. 흡입력도 대단했다. 우리의 정신적 자석이었다.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원인이 있다. 선생은 매력이 있었다.”

여성들 “그와 살면 죽어도 여한 없겠다”

중년시절의 녜화링. 인하이광은 녜화링의 모친과 샤쥔루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1976년, 세계 각국 작가 300여명이 연합으로 일을 벌였다. 미국인 남편과 함께 아이오와대학에 작가습작교실을 설립한 중국 여류작가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녜화링의 작품들이 영어권은 물론 한자문화권을 강타했다. 문학작품보다 단편소설 모음 형식의 회고록이 주목을 끌었다. 황당했던 시절의 중국 명인들, 특히 인하이광의 이야기를 유려한 문체로 접한 독자들의 반응은 긴말이 필요 없었다. “애통하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여자들이 특히 심했다. 학생, 미혼여성, 유부녀, 노는 여자 할 것 없이 하는 말들이 비슷했다. “인하이광과 몇 년을 한집에서 생활한 녜화링 모녀는 복을 타고났다. 20년을 부부로 함께한 샤쥔루(夏君璐·하군로)는 말할 것도 없다. 부러워 죽겠다. 나라면 몇 달만 같이 살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소년 인하이광은 조숙했다. 중학생 시절 철학자 진웨린(金岳霖·김악림)의 난해한 논리학 서적 읽으며 새벽을 기다렸다. 모르면 읽고 또 읽으면 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고등학교 마치자 진웨린 만나겠다며 무조건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으로 갔다. 칭화대학 철학과 교수 진웨린은 타고난 자유주의자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대하고 존중했다. 나이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청년에게 맥스웰 커피 권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대철학자의 서재를 본 인하이광은 깜짝 놀랐다. 서가에 책이라곤 30여권이 다였다. 용기를 내서 이유를 물었다. 비수 같은 답이 소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학술서적이건 문학작품이건 유행을 탄 책들은 선전문이나 다름없다. 사색의 원천이 될 몇 십 권이면 충분하다. 사색이 없는 사람은 행동이 거칠고 염치를 모른다. 사색은 사고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을 진보나 보수라 규정하는 사람들은 변기통에 꿈틀거리는 구더기나 마찬가지다.”

인, 서남연합대 진학 진웨린 지도받아

타이베이 골목의 인하이광이 살던 집. [사진 김명호]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진웨린은 쿤밍(昆明)에 있는 전시 중국의 최고학부 서남연합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하이광은 진웨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서남연합대학에 합격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준재들과 어울리며 진웨린의 지도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를 지지하고 숭배했다. 틈만 나면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에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내지는 파시즘 성향이 강한 글을 투고했다. 내용이 격렬하고 흡입력이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우파로 명성을 떨쳤다. 장제스 숭배가 원인이었다.

국민당 지도부가 인하이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앙일보에 자리를 마련했다. 필봉이 매서웠다. 장제스도 어떤 청년인지 궁금했다. 관저에서 인하이광과 점심 하며 장시간 얘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실망했다. 장제스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청년을 중앙일보 주필에 임명했다. ‘민심을 수습하라’는 인하이광의 글 읽고 얼굴을 찌푸렸다. 불쾌한 내용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국·공전쟁 패배를 감지하자 중요 임무를 줬다. “중앙일보를 타이베이로 이전해라.”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은 싸구려 니켈반지를 사서 곱게 포장했다. 친구 여동생 샤쥔루와 강변을 산책했다. 헤어질 무렵 선물을 줬다. “나는 대만으로 떠난다. 인연이 있으면 대만에서 만나자.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리겠다. 올 때는 이 반지를 끼고 와라. 싫으면 저 강물에 던져버려라. 네가 오면 나는 무조건 네 말만 듣겠다.” 샤쥔루는 나이는 어려도 알 건 다 알았다. 반지를 인하이광에게 돌려주면서 왼손 약지를 내밀었다.

타이베이에 정착한 ‘대만판 중앙일보’ 주필 인하이광은 민주와 인권을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대만대학도 철학과 교수로 초빙했다. 강의실은 연일 인산인해였다. 인하이광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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