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쉽게 만들어야” 여성들 재봉노동서 해방시킨 대발명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의복 재단기’ 발명한 이소담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여성들의 옷차림에 정말 관심이 많았다. 세간의 관심과 평가에는 환호도 섞여 있었겠지만, 실상은 비난이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과감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은 세상으로부터 쉽게 환영받지 못했다. 여성의 옷차림에 대해서만은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가 꾸준했다. 달라진 여성들의 옷차림은 줄곧 ‘사치’와 ‘낭비’로 취급됐으며, ‘모던 걸’들은 한낱 유행을 따르는 철없는 족속들로 묘사됐다.
‘단정해야 한다’거나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규범 역시 지속적으로 강요됐다. 대다수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은 물론 ‘아버지’와 ‘남편’과 ‘오라버니’의 마뜩찮은 시선과도 싸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여성의 모던한 차림은 큰 용기와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1930년대에도 눈에 띄는 신식 차림의 여성들보다 전통적인 차림의 여성들이 여전히 더 많았다.
대한발명가협회 이사 지낸 여성발명가
이후 이소담은 경성으로 진출해 종로 중앙기독청년회(YMCA)에서 주최하는 모사편물강습회에 강사로 나섰다. 1934년에는 서울 여자기독청년회(YWCA) 앞 부인상회 경성당에 ‘이소담 재봉연구소’를 직접 차리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복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연구소 개설과 동시에 편물(編物·뜨개질)과 재단 강습을 시작했다.
당시 종로에 있던 동아일보 사옥과 천도교회관, 기독청년회관 등지에서는 실용의복 재단을 배우려는 여성들을 상대로 크고 작은 재봉강습회가 연이어 개설됐다. 당시 종로는 신식 차림의 여성들로 넘실대는 모던 패션의 거리인 동시에 먼저 깬 여성들이 앞다투어 실용적인 재단 기술과 모던 의복 지식을 익히는 배움의 현장이기도 했다.
여성이 ‘뜨개질’과 ‘마름질’ 따위를 배우는 일은 전통적인 여성의 세계에 안주하는 성(性)역할 고착화로 오해되기 쉽다. 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소담의 현대의복 제작 강습은 파격적인 도전에 가까웠다. 이전까지 여성의복이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전승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짜고 짓는 법밖에 없었다. 일군의 여성들이 신식 의복 제작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한 모던 복식문화 사회공동체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했다.
또 그전까지 ‘모던 스타일’의 현대 의복은 너무 값이 비쌌고, 개인이 만들어 입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이소담이 주최한 강습회에 여성들의 호응이 대단한 것은 당연했다. 강의장이 비좁을 정도로 수강생을 늘리고 수업도 더 많이 개설했지만 원하는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 어려웠다.
여성용품 비밀주머니 개발, 뉴욕 초청도
이소담은 신식 의복제작 교육을 통해 여성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는데 기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금방 변하지 않았다. 개인이 설립한 작은 재봉연구소 하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서양식 바느질과 재봉기술을 익혀 현대 의복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장비가 없는 가정으로 돌아가서는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소담은 스스로 모던 양장을 입을 줄 아는 깬 여성이었으나, 많은 여성들이 전통 의복을 입어야만 하는 조선사회의 복잡한 사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소담은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와 모자란 용기를 탓하기 전에, 그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를 발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치장에만 힘쓴 껍데기만 모던한 여성들과는 한 차원 다른 행보였다.
「특허국에 비친 여성의 창의」
『조선일보』1962년 5월 22일) 이 발명품은 여성 의복 중에서도 저고리를 만드는 데 특화된 기계였다. 사광형(四光型)이란 기계 이름은 조작에 따라 네 가지 형태의 재단이 모두 가능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하나의 재단기로 ‘소매’와 ‘깃’과 ‘도련’과 ‘섭’ 네 가지를 모두 구현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한복’으로 불리는 조선의복은 손으로만 재단하기 매우 어려운 형태의 옷이었다. 특유의 날카로운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을 모두 살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소담은 만들기도 어렵고 노동이나 활동에도 적합하지 않은 당시의 조선의복을 개량하고 또 그것을 가정에서 직접 손쉽게 재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디자인은 검박하지만 활동성을 높였다. 기존 조선의복에서 완전하게 멀어지지 않은 절충적인 형태였다. 전통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비난 받을 염려도 적고, 여성의 노동과 활동에도 편리함을 제공해 주니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다.
여성 발명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발명품의 쓸모와 사회적 기여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가 이어졌다. 당시 여러 신문이 동시에 이소담의 발명과 특허출원을 주목했다. 『동아일보』(1936년 1월 1일)는 ‘우리네 옷 재단에 불편한 것을 느끼고 약 1년 동안 틈틈이 연구한 결과 조선복 재단형을 발명하야 특허국에 출원’했다고 기사를 냈다. 또한 『조선중앙일보』(1936년 1월 6일)는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중요한 시기를 오직 무미건조한 재봉노동에 소비하고 마는 안타까운 사정을 일소하기로 결심하고 두루 고심한’ 결과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소담은 당시 여성들이 옷을 만들고 입을 때 겪어야 했던 복잡한 사정과 문제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해했다. ‘모던’을 앞세워 너무 앞서가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전통’을 방패막이로 안주하지도 않았다. 혹자는 이소담이 여전히 ‘조선옷’에 얽매여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복 재단기’의 발명이 여성해방과 거리가 먼 행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이소담의 발명은 조선의 여성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내딛은 힘찬 발걸음이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가장 필요한 장치를 고안하고, 조금이나마 진전된 변화를 실천해냈기 때문이다.
조선의복을 개량하고, 가정에서 직접 옷을 쉽게 재단할 수 있게 만든 이소담의 발명은 서양에서 장갑의 보급에 기여한 그자비에 주뱅(Xavier Jouvin)의 업적을 연상시킨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실생활과 노동 현장에서 장갑을 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장갑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도 구체 관절의 움직임이 가장 복잡한 손에 착용하는 것이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장인들이 실크와 가죽을 손으로 떠서 만든 장갑은 귀족들이 멋을 내기 위한 사치품에 불과했다.
1834년 프랑스의 그자비에 주뱅이 인체의 해부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손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금속틀이 부착된 재단기를 발명함으로써 장갑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자동화된 공정에 의해 한 번에 여섯 짝씩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가 보급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값싸고 질 좋은 장갑을 착용할 수 있게 됐다.
이소담이 더욱 대단한 까닭은 재단기의 특허권을 곧바로 사회로 환원해 많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있다. 그저 누구나 쉽게 옷을 지어 입기를 바랐다. 이소담은 여성이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의복을 갖춰 입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규범에 따라 ‘전통적’이거나 ‘여성스럽다’고 평가받는 옷차림보다는, 여성이 실용적으로 입고, 또 스스로 쉽게 옷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소담에게 ‘모던’이란 ‘멋’이나 ‘꾸밈’보다 ‘실용’과 ‘편리’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후에도 이소담은 계속 의복개량과 재단기술 연구에 매진한다. 평생을 여성의복과 관련한 발명에 투신했다. 하지만 자료의 부족 탓으로 이소담의 생몰 연대는 아직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930년대 여성의복계에 혁명을 일으킨 여성발명가에 대한 사회적 기록이 너무나 빈곤하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씁쓸하다. 더구나 이소담은 1950년대에는 대한발명가협회 이사직을 맡았으며, 1984년에는 여성 위생용품 휴대를 위한 ‘여성의복용 비밀주머니’를 개발한 공로로 ‘뉴욕국제발명전’에 초청되기까지 한 인물이다. 평생에 걸쳐 발명에 투신하며 모던한 세계를 스스로 창안해 낸 이소담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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