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시대’ 아닌 다채로운 시대
매슈 게이브리얼, 데이비드 M 페리 지음
박수철 옮김
까치
‘중세’라고 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연관검색어는 아마 ‘암흑’일 것이다. 그동안 중세 천 년을 암흑시대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를 유럽에 빛이 사라진 시대로 보고 ‘어둠’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중세=암흑’이라는 공식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런 중세를 ‘빛의 시대’라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중세학 교수 매슈 게이브리얼과 미네소타대 역사학과 교수 데이비드 M 페리다. 이들은 과연 어떤 연유에서 그런 담대한 주장을 펼 수 있을까. 『빛의 시대, 중세』를 통해 지은이들은 조목조목 기존 주장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다채로운 중세를 증명해 보였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유럽에 들어선 많은 왕국의 지도자들은 지중해 동부에 왕성하게 살아 숨 쉬는 로마제국(동로마제국)과의 유대를 통해서 정치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도시로서의 로마는 이 시기 내내 여전히 사회적, 문화적 생산의 장소로 기능했다. 로마제국은 중세에도 호흡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다.
유럽이 중세에 들어선 시기에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부상한 광활한 이슬람제국이 전성기를 누렸다.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이슬람제국은 이교도에 포용적이었고 이들이 살고 번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줬다. 예루살렘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오래전부터 늘 살아온 방식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 세계에선 중세를 종식시키고 르네상스를 불러온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들이 고스란히 승계되고 발전되기조차 했다.
중세 천 년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종교적 전통, 언어가 존재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관측했고 대학을 설립했으며 세계적인 과학혁명에 기여할 토대를 닦았다. 중세에 공존했던 바이킹과 몽골제국, 흑사병 그리고 독특한 공동체 길드의 의미도 재음미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1321년 라벤나의 영묘 예배당 공간에서 중세가 끝났다고 설정한다. 중세의 ‘마지막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원대한 상상력의 작품인 『신곡』의 마지막 편 ‘천국’을 쓰면서 이 예배당의 모자이크로부터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메디움 아이붐(medium aevum·중간시대) 중세는 결코 단순하거나 명확하지 않고 뒤죽박죽이고 인간적이다. ‘기독교 맹신과 폭력, 무지만이 이 시대를 지배했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으며 중세에도 지금처럼 사람들은 다채롭게 살았다. ‘암흑시대 중세’라는 딱지가 과연 유럽 백인 남성의 시각에서 붙여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새 빛으로 재조명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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