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손가락이 성남을 지킨다, 마흔에도 펄펄 ‘노력 끝판왕’

정영재 2023. 7.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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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K리그 최고령 골키퍼 김영광
성남 FC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영광. 고교 시절 강한 슈팅을 막다 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당해 왼쪽 넷째손가락이 크게 휘었다. 최영재 기자
‘앞에는 조국, 뒤에는 영광’

2003년 11월 7일자 중앙일보에 내가 쓴 기사의 제목이다.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이 콜롬비아와 평가전을 했는데 최전방의 정조국이 혼자 두 골을 넣고, 골키퍼 김영광이 놀라운 선방으로 2-0 승리를 지켰다. 두 선수의 이름을 따 ‘조국의 영광’이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20년이 흘렀다. 정조국은 K리그 통산 392경기에서 121골을 넣고 은퇴해 현재는 제주 유나이티드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김영광은 아직 골키퍼 장갑을 벗지 않았다. 올해 K리그2로 강등된 성남 FC에서 6경기에 출전해 10골을 허용했다. K리그 현역 최고령(40세) 김영광은 프로 통산 594경기에 출전해 김병지(은퇴·706경기)에 이어 2위에 올라 있다.

김영광은 ‘노력의 끝판왕’이다. 골키퍼로서 작은 키(183㎝)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훈련량으로 순발력과 점프력을 키웠다. 지금도 스피드만큼은 누구에게도 안 뒤진다고 자신한다. 성남 분당구 정자동에 있는 성남 FC 클럽하우스에서 그를 만났다. 경부고속도로 옆 현대중공업 본사와 한국잡월드 사이에 있는 이곳은 평당 땅값이 1억원을 넘는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클럽하우스다. 김영광은 “축구장이 약 2000평이니 2000억이 넘는 잔디밭에서 운동하는 셈인데, 선수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고 더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골키퍼로선 작은 키 183㎝ 핸디캡 이겨내

Q : 작년에 32경기를 뛰었는데 올해는 출전 횟수가 적네요.
A : “컨디션이 나쁘거나 부상을 당한 건 아니고요. 팀 성적이나 감독님 성향에 따라 선수 기용은 달라질 수 있죠. 경기에 못 나가는 선수는 불만이 아니라 욕망을 품어야 합니다. ‘저 자리는 내가 차지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없으면 축구 그만둬야죠. 그런 마음으로 준비해서 기회가 오면 꽉 잡아야죠.”

Q : 골 먹고 난 뒤의 ‘나라 잃은 표정’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생각을 합니까.
A : “아쉬움과 자책이죠. ‘내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골이었나’ ‘수비수 위치를 좀 더 잘 체크해 줬으면 됐을 텐데’ 이런 생각이죠. 수비수한테는 ‘네 탓이 아니다. 골 먹으면 그냥 형 탓을 하고, 더 자신 있게 뛰어라’고 합니다. 좋은 팀에 있으면 한두 개 막아도 빛이 나고, 약한 팀에 있다 보면 모든 공을 다 막아내도 팀을 이기게는 못하는 게 골키퍼죠”

Q : 잉글랜드로 진출한 김지수(18·브렌트퍼드)한테 큰 도움을 줬다고요.
A : “프로 23년을 뛰면서 수많은 수비수를 봤잖아요. 빨리 성장하는 지름길을 아니까 그걸 신인 수비수들에게 자주 얘기했어요. 지수는 체격(192㎝)이 좋고 가진 게 많은 선수잖아요. 실수를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격려해줬죠. 지수는 공격수가 압박을 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데, 빌드업(공격전개) 할 때 큰 강점이 됩니다. 김민재(바이에른 뮌헨)와 비슷한 스타일인데 스피드는 조금 떨어져요. 좋은 팀에 갔으니 순발력이나 풋워크 등을 더 발전시킬 수 있겠죠.”

Q : 이제 여섯 번만 더 나가면 K리그 600경기 출장이네요.
A : “경기장 가면 상대팀 코치들이 와서 꾸벅 인사를 합니다(웃음). 이렇게 오래 했나 싶기도 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다시 어떤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운동과 자기관리를 했다는 겁니다. 600경기 채우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으면 화끈하게 장갑 벗을 겁니다.”

Q : 도대체 운동을 얼마나 어떻게 했나요.
A : “정말 미친놈이었던 것 같아요. 잠자려고 누웠다가도 이 부분이 잘 안 돼, 찜찜해 그러면 바로 나갑니다. 점프가 안 되면 이단줄넘기와 허들점프 하고, 다이빙이 안 되면 혼자서 다이빙 하고. 공이 잘 안 보이면 일부러 어두운 데 가서 공 차 달라고 하고, 그러다가 얼굴에도 맞고…. 어찌 보면 무식했는데 그냥 자신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상당했던 게 가장 아쉽죠.”

Q : 제일 큰 부상이 뭐였죠?
A : “울산 현대에서 잘 나가고 대표팀에서도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종아리를 다쳤어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견디다 못한 종아리 근육 7~8㎝가 터진 겁니다. 6개월 쉬는 바람에 후배 김승규가 치고 올라왔죠. 중학교 때부터 프로까지 이단줄넘기를 하루 2000개씩 했는데 부상 때문에 그걸 못하게 됐어요. 병원에서도 더 무리하면 아예 축구를 못하게 된다고 해서 웨이트 운동으로 바꿨습니다.
‘잘하면 김병지처럼 스타 돼’ 부모님 설득

김영광의 왼쪽 넷째손가락은 바깥쪽으로 크게 굽어 있다. 16세 대표팀 훈련 도중 강한 슈팅을 정통으로 맞아 뼈가 으스러졌다. “뼈가 조각조각 나면서 손가락이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어요. 응급처치를 한 팀닥터가 수술하고 깁스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요. 괜찮다고 하고 골절 부위에 부목을 댄 뒤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테이핑을 했죠. 그 상태로 대회 출전해 승부차기도 막고 했어요. 대회 끝나고 병원에 갔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겁니다. 수술하면 모양은 좋아지겠지만 움직이는 데 좀 불편할 거라고 해서 그대로 놔뒀어요. 결혼반지도 못 낀다고요? 오른손에 끼면 되죠. 하하.”

Q : 골키퍼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 “제가 축구 명문 순천중앙초 출신이고, 원래는 필드 플레이어였어요. 5학년 때 골키퍼가 다쳐서 제가 하겠다고 나섰죠. 당시에는 경기에 잘 못 뛰었거든요(웃음). 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소질도 있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왔어요. 당시만 해도 골키퍼는 ‘잘해 봐야 욕만 먹는 포지션’이어서 부모님이 ‘골키퍼 할 거면 축구 그만둬라’ 하셨지요.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스타로 뜬 김병지 선수 얘기를 하면서 ‘골키퍼도 잘하면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다’며 설득했죠.”

Q :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말에 냉소적인 사람들도 많은데요.
A : “안 해봐서 그래요. 저는 해봐서 알아요. 하니까 되더라고요. 남과 조금만 다르게, 1년 정도 지나면 차이가 확 벌어져요. 몸은 거짓말 안 해요. 기억을 하면 자동으로 반응이 나옵니다. 공부도 다른 일도 비슷하겠죠. 저는 프로 데뷔해서 1년 반 동안 남모르는 노력을 했더니 주전이 되더라고요. 워라벨도 좋은 얘기죠. 그렇다면 하루 2~3시간 운동할 때 100%가 아니라 1000%를 쏟아 부어야 합니다. 효율적으로, 강하고 굵게 노력하라는 겁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있다. 좀 모자라 보이는 것이 도리어 제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김영광은 국가대표로 17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커리어 후반에는 약팀을 전전하면서 골도 많이 먹었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골문을 지킨다. 그의 노력과 헌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에는 조국, 뒤에는 영광’ 이후 20년. 그에게 또 하나의 문장을 선물한다. ‘굽은 나무는 선산을 지키고, 굽은 손가락은 성남을 지킨다.’

■ ‘리틀 칸’ 별명…올림픽 1000분 무실점 기록 34분 남기고 깨져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 그리스전을 앞두고 김영광이 훈련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광의 별명은 ‘리틀 칸’이다. 독일의 전설적인 골키퍼 올리버 칸을 닮아서다. 험상궂은 표정과 딱 벌어진 체격도 비슷하다. 뛰어난 반사신경에서 나오는 슈퍼 세이브, 수비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수비 리딩도 닮았다.

김영광에게 리틀 칸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무실점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칸은 바이에른 뮌헨에서 뛸 때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800분 무실점 기록을 세운 바 있다. 김영광도 2004 아테네 올림픽(지역예선 포함)에서 1000분 무실점 기록에 도전했다. 홈팀 그리스와의 본선 첫 경기에서 후반 32분 실점하는 바람에 무실점 행진이 966분에서 멈췄다. 34분을 남기고 대기록이 무산됐지만 김영광은 ”수비수 한 명이 퇴장당한 상황에서 선전했다. 2-2로 비겼는데 내 축구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했다.

김영광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전남 드래곤즈 시절 대표팀에 가서 경기만 뛰고 오면 감독이 리그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싶다가도 그런 일이 반복되자 하루는 감독 앞에서 골키퍼 장갑을 벗어 집어던지고 ”나 축구 안 해“라며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결국 김영광은 다른 팀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한순간 욱 하는 감정을 참지 못한 게 축구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고, 그 뒤로 커리어가 꼬여버렸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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