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만화 ‘샤랄라~’ 꽃배경의 원조 알폰스 무하, 100년 전 그림 맞아?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2023. 7.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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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로 부활한 알폰스 무하 작품

알폰스 무하의 장식패널화 ‘백일몽’(1898). [사진 무하 재단]
알폰스 무하의 직물 무늬 디자인 '데이지와 함께 있는 여인'(1899-1900) [사진 구글아트프로젝트]

여인의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물결치고 풍성하게 피어난 꽃이 사방에 흩날린다. 지금 서울에서 열리는 두 개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다. 두 전시 모두 그래픽아트 거장 무하(1860~1939)의 예술을 동영상과 음악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22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막을 여는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은 무하의 고국인 체코에서 제작했고, 롯데백화점 본점 에비뉴엘에 있는 그라운드 시소 관에서 지난 5월 시작한 ‘알폰스 무하: 더 골든 에이지’는 한국에서 제작했다. 아쉽게도, 양쪽 다 무하 원작의 매력에 주로 의지하고 있고 원작의 애니메이션화에 있어서 기발한 점은 별로 없다.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도 무하에 매료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막한 체코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의 한 장면. [사진 에스와이코마드]
서울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그라운드 시소 관에서 전시 중인 국내산 몰입형 미디어아트 ‘알폰스 무하 더 골든 에이지’의 한 장면. [사진 문소영]
아무튼 무하 전시 두 개가 동시에 열리는 것을 보면 이 체코 거장이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무하의 이름을 몰라도 그의 그림을 보고 낯설어 하거나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반응은 첫째로 “와, 예쁘다.” 둘째로 “요즘 만화 같아. 이 작가가 정말 100년 전 사람이야?‘이다.

실제로 무하는 현대 만화, 특히 일본의 쇼조망가(소녀만화)와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순정만화에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캔디 캔디’ 같은 1970년대 일본 쇼조망가 대표작을 보면 남녀 캐릭터가 미모를 반짝거리며 등장할 때 그들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난데없이 ‘샤랄라~’하게 꽃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종종 연출된다. 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도 마찬가지여서, 90년대 말 탄생한 단어 ‘꽃미남’은 순정만화 꽃배경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이 모든 것이 100여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꽃덩굴로 둘러싸인 여인을 즐겨 그렸던 무하의 유산이다.

무하는 꽃과 여인이라는 자칫 진부하기 쉬운 주제를 ‘아르누보(Art Nouveau)’ 즉 당대의 ‘새로운 예술’ 양식을 통해 우아하고 세련되게 구현했다. 그가 석판화로 제작한 광고 포스터나 장식패널화 작품을 보면, 여인의 굽이치는 머리카락과 매끄럽게 흐르는 몸의 선과 옷의 주름선, 그를 둘러싼 식물 덩굴과 흐드러진 꽃잎이 모두 리듬감 있는 유려한 선으로 묘사돼 있고 하나의 통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로맨스 판타지 웹툰 ‘재혼황후’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아르누보가 탄생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문화 열풍인 자포니즘, 특히 우키요에(浮世繪) 목판화의 유행도 있었다. 무하 역시 우키요에를 수집했고 그 뚜렷하고 유려한 윤곽선 묘사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러한 무하의 그림이 우키요에에 뿌리를 둔 일본 만화에 훗날 영향을 주었으니 돌고 도는 관계라고나 할까.

한편 한국의 경우는 2000년대 들어 순정만화에서 공주와 귀족 영애가 나오는 역사·판타지보다 현대 배경 로맨스가 많아지면서 무하 스타일 꽃배경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웹툰의 시대가 열리면서 아예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로판’으로 통칭되는 로맨스 판타지 웹툰이 대거 쏟아지면서 무하 스타일 꽃배경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재미있는 것은 옛 순정만화와 달리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할 수 있는 덕분인지, 꽃덩굴 외에도 무하 스타일의 또 다른 중요 요소가 활발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바로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정교한 패턴의 원형 후광이다. 그 원형 후광은 파리의 스타 미술가이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무하가 조국 체코 전통문화의 뿌리인 비잔틴 예술(동로마제국의 예술)에서 찾은 모티프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에 있던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난 무하는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은 예술가가 아니었다. 여러 굴곡을 겪은 후 어느 귀족의 후원을 얻어 20대 후반 나이에 마침내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유학을 왔건만, 갑자기 후원이 끊기는 바람에 삽화 일을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다. 그러나 삽화가로서 열심히 일하던 그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가 왔다.

알폰스 무하가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해 제작한 연극 포스터. 왼쪽부터 '지스몽다'(1894) '동백꽃 여인 (춘희)'(1896) '메데이아'(1898) [위키피디어]
때는 그가 34살이던 1894년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무하는 친구가 일하는 인쇄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의 인쇄소는 인쇄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그래픽디자인 회사였다. 그때 갑자기 중대한 고객의 주문이 들어왔다. 당대 파리의 슈퍼스타이자 지금도 연극사의 명배우로 회자되는 사라 베르나르(1844~1923)가 자신이 연출·주연하는 새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급히 주문한 것이다. 문제는 인쇄소의 거의 모든 직원이 성탄절 휴가를 간 상태. 인쇄소 매니저는 어쩔 수 없이 무명의 무하에게 포스터 디자인을 맡겼다.

무하는 베르나르가 마치 옛 성당의 아치형 벽감(niche) 안에 서 있는 성녀상처럼 보이게 하는 독특한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특히 배경의 비잔틴 양식 모자이크와 동방정교회 십자가가 그녀의 중세풍 의상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무하는 슬라브 예술의 뿌리인 비잔틴 예술과 고향에서 보던 성당 장식에서 영감을 끌어내 이 포스터를 창작했던 것이다.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1865년 21살 모습(왼쪽, 펠릭스 나다르의 사진)과 알폰스 무하를 처음 만나던 즈음인 1894년 50살 연극 '토스카'에 출연한 모습. 베르나르는 50대에도 계속 주역을 맡고 비평가와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커리어의 절정에 있었다. [사진 위키피디어, 미국 의회도서관]
완성된 포스터를 보고 까다로운 사라 베르나르조차 감탄하며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포스터는 1895년 새해 첫날 파리 곳곳에 내걸렸고, 곧 파리 대중 사이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들은 비잔틴 양식에 익숙하지 않은 서유럽인이라서 이 포스터가 아주 이국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집가들이 밤에 몰래 면도칼로 포스터를 뜯어가는 일까지 생겼다.

베르나르는 당장 무하와 6년 계약을 맺고 포스터는 물론 무대와 의상 디자인 일부까지 맡겼다. 대(大)배우와 함께 작업하면서 무하는 작품의 영역과 퀄리티, 인기에서 모두 급성장했다. 베르나르를 위해 ‘동백꽃 여인(춘희),’ ‘메데아’ 등 7점의 연극 포스터를 제작했고, 베르나르가 등장하는 향수와 과자 광고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연이어 히트하며, 그에게 다른 광고포스터는 물론 엽서와 달력, 심지어 보석과 식기 디자인 의뢰까지 쏟아졌다.

대량 인쇄 ‘장식패널화’ 분야서도 명성

알폰스 무하의 '황도 십이궁'(1896). 본래 달력 디자인이었으나 이 그림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텍스트를 뺀 장식패널화로 다시 제작되었다. [사진 무하 재단]
특히 무하의 예술이 빛을 발한 것은 ‘장식패널화’ 분야였다. 장식패널화는 집을 장식하는 대량 인쇄 석판화로서, 오늘날의 아트 포스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본래 화가를 꿈꾸었던 무하지만 그는 광고포스터나 장식패널화 같은 대중적인 예술을 창작하는 것에 자부심을 표했다. “나는 사적인 응접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예술에 관련되어 기쁘다.”

하지만 무하는 명성이 커질수록 마음 한구석에 공허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1900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오스트리아관의 대표 작가로 선정되어 일을 하고 훈장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 치하에 있는 조국 체코에 대한 마음의 빚이 커졌다.

그래서 그는 슬라브인들의 고통과 영광을 기록한 거대 회화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몇 차례 미국 여행으로 후원 기금을 확보한 후 그는 1910년에 고국 체코로 돌아가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전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끝난 후 마침내 조국이 체코슬로바키아로서 독립하자 무하는 기쁨에 차서 신생 국가를 위한 지폐와 우표부터 경찰복까지 재능기부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완성된 ‘슬라브 서사시’를 수도 프라하 시에 기증했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20번째 그림이자 마지막 그림인 '슬라브인들의 승화'(1926) [위키피디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막한 체코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에서 '슬라브 서사시' 장면. [사진 문소영]
사실 ‘슬라브 서사시’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모던아트의 시대에 철 지난 아카데미 역사화 스타일이고 구식 영화포스터처럼 과장되게 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작에는 파리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조국으로 돌아온 미술가의 깊고 순수한 사랑이 담겨 있기에, 그를 기리는 전시와 미디어아트에는 ‘슬라브 서사시’ 섹션이 빠지지 않는다. '알폰스 무하 이모션'은 체코산 미디어아트답게 슬라브 서사시 부분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다.

또한 무하가 파리에서 창작한 아르누보 상업미술에도 가벼운 아름다움과 소비주의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비잔틴 예술 모티프에 스며있는 조국 사랑, 그리고 “사적인 응접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예술”에 자부심을 갖는 현대적인 정신이 그의 포스터와 장식패널화에 담겨 있다. 어쩌면 그의 그림이 현대 만화와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것도 그 아름다움 아래에 깊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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