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만화 ‘샤랄라~’ 꽃배경의 원조 알폰스 무하, 100년 전 그림 맞아?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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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로 부활한 알폰스 무하 작품
여인의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물결치고 풍성하게 피어난 꽃이 사방에 흩날린다. 지금 서울에서 열리는 두 개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다. 두 전시 모두 그래픽아트 거장 무하(1860~1939)의 예술을 동영상과 음악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22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막을 여는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은 무하의 고국인 체코에서 제작했고, 롯데백화점 본점 에비뉴엘에 있는 그라운드 시소 관에서 지난 5월 시작한 ‘알폰스 무하: 더 골든 에이지’는 한국에서 제작했다. 아쉽게도, 양쪽 다 무하 원작의 매력에 주로 의지하고 있고 원작의 애니메이션화에 있어서 기발한 점은 별로 없다.
대배우 사라 베르나르도 무하에 매료
실제로 무하는 현대 만화, 특히 일본의 쇼조망가(소녀만화)와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순정만화에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캔디 캔디’ 같은 1970년대 일본 쇼조망가 대표작을 보면 남녀 캐릭터가 미모를 반짝거리며 등장할 때 그들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난데없이 ‘샤랄라~’하게 꽃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종종 연출된다. 1980~90년대 한국 순정만화도 마찬가지여서, 90년대 말 탄생한 단어 ‘꽃미남’은 순정만화 꽃배경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이 모든 것이 100여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꽃덩굴로 둘러싸인 여인을 즐겨 그렸던 무하의 유산이다.
무하는 꽃과 여인이라는 자칫 진부하기 쉬운 주제를 ‘아르누보(Art Nouveau)’ 즉 당대의 ‘새로운 예술’ 양식을 통해 우아하고 세련되게 구현했다. 그가 석판화로 제작한 광고 포스터나 장식패널화 작품을 보면, 여인의 굽이치는 머리카락과 매끄럽게 흐르는 몸의 선과 옷의 주름선, 그를 둘러싼 식물 덩굴과 흐드러진 꽃잎이 모두 리듬감 있는 유려한 선으로 묘사돼 있고 하나의 통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경우는 2000년대 들어 순정만화에서 공주와 귀족 영애가 나오는 역사·판타지보다 현대 배경 로맨스가 많아지면서 무하 스타일 꽃배경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웹툰의 시대가 열리면서 아예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로판’으로 통칭되는 로맨스 판타지 웹툰이 대거 쏟아지면서 무하 스타일 꽃배경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재미있는 것은 옛 순정만화와 달리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할 수 있는 덕분인지, 꽃덩굴 외에도 무하 스타일의 또 다른 중요 요소가 활발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바로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정교한 패턴의 원형 후광이다. 그 원형 후광은 파리의 스타 미술가이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무하가 조국 체코 전통문화의 뿌리인 비잔틴 예술(동로마제국의 예술)에서 찾은 모티프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에 있던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난 무하는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은 예술가가 아니었다. 여러 굴곡을 겪은 후 어느 귀족의 후원을 얻어 20대 후반 나이에 마침내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유학을 왔건만, 갑자기 후원이 끊기는 바람에 삽화 일을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다. 그러나 삽화가로서 열심히 일하던 그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가 왔다.
무하는 베르나르가 마치 옛 성당의 아치형 벽감(niche) 안에 서 있는 성녀상처럼 보이게 하는 독특한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특히 배경의 비잔틴 양식 모자이크와 동방정교회 십자가가 그녀의 중세풍 의상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무하는 슬라브 예술의 뿌리인 비잔틴 예술과 고향에서 보던 성당 장식에서 영감을 끌어내 이 포스터를 창작했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당장 무하와 6년 계약을 맺고 포스터는 물론 무대와 의상 디자인 일부까지 맡겼다. 대(大)배우와 함께 작업하면서 무하는 작품의 영역과 퀄리티, 인기에서 모두 급성장했다. 베르나르를 위해 ‘동백꽃 여인(춘희),’ ‘메데아’ 등 7점의 연극 포스터를 제작했고, 베르나르가 등장하는 향수와 과자 광고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연이어 히트하며, 그에게 다른 광고포스터는 물론 엽서와 달력, 심지어 보석과 식기 디자인 의뢰까지 쏟아졌다.
대량 인쇄 ‘장식패널화’ 분야서도 명성
하지만 무하는 명성이 커질수록 마음 한구석에 공허를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1900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오스트리아관의 대표 작가로 선정되어 일을 하고 훈장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 치하에 있는 조국 체코에 대한 마음의 빚이 커졌다.
그래서 그는 슬라브인들의 고통과 영광을 기록한 거대 회화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몇 차례 미국 여행으로 후원 기금을 확보한 후 그는 1910년에 고국 체코로 돌아가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전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끝난 후 마침내 조국이 체코슬로바키아로서 독립하자 무하는 기쁨에 차서 신생 국가를 위한 지폐와 우표부터 경찰복까지 재능기부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완성된 ‘슬라브 서사시’를 수도 프라하 시에 기증했다.
또한 무하가 파리에서 창작한 아르누보 상업미술에도 가벼운 아름다움과 소비주의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비잔틴 예술 모티프에 스며있는 조국 사랑, 그리고 “사적인 응접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예술”에 자부심을 갖는 현대적인 정신이 그의 포스터와 장식패널화에 담겨 있다. 어쩌면 그의 그림이 현대 만화와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것도 그 아름다움 아래에 깊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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