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반납했지만 내 예술은 못가져갑니다
심청가 완창하는 86세 조상현 명창
그런 그가 어느날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한 국악경연대회 금품수수 혐의로 2003년 검찰에 기소되면서다. 2008년 무형문화재 자격까지 반납한 후엔 공식적인 무대에 서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예인에게 통탄의 세월이었겠지만, 최고의 소리를 잃은 국악계에 큰 손실이자 그의 소리를 사랑한 귀명창들에게도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몇해 전 유네스코 판소리문화전당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그의 문화재 복권 운동이 일기도 했다.
이번 무대는 올해 대대적인 변신을 예고한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삼고초려 끝에 성사됐다. 관계자가 11번이나 찾아가 설득한 정성에 조 명창이 탄복한 것. 9월 23일 딱 100명에게만 25년 만의 조상현판 심청가를 직관하는 역사적인 기회가 주어진다는데, 전주한옥마을 130년 된 동헌에서 진짜 옛날 판소리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12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조상현 명창은 당당한 풍채는 여전했지만 “겁이 나 죽겠다”고 했다. 지금도 자택 지하 연습실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매주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강연을 하고 있다니 “무릇 소리란 나이와 함께 익어가는 것”이라며 의연할 줄 알았는데, 너무도 솔직한 고백에 깜짝 놀랐다.
“나이는 속일 수 없거든. 내가 알기로 파바로티는 칠십쯤에 죽었는데, 거기다 대면 나는 진즉 산에 드러누워 있어야겠지.(웃음) 이 도령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이 넘었어요. 완창한 지도 수십 년이라, 제대로 서 있기나 할라나 모르겠네.”
70년대 국립창극단 주역 도맡아
소리의 본고장 전남 보성 출신인 그는 여섯 살부터 유성기를 들으며 소리를 독학하다 열한 살에 강산제 보성소리 계승자인 정응민 문하에 들어갔다. ‘보성소리’란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박유전이 창시한 유파로, 품위 있고 절제된 소리로 엘리트층의 사랑을 받아온 판소리 최고봉이다.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호방하고 웅장한 성음을 가진 조 명창은 1970년대 국립창극단 주역을 도맡으며 창극 전성기를 이끌었다.
Q : 당시 인기가 대단하셨죠.
A :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다녀왔는데, 군사훈련만 하는 줄 알았던 이북에서 피바다가극단의 ‘아리랑’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거예요. 앞으로는 총칼전쟁이 아니라 문화전쟁이니 우리도 빨리 예술을 성장시켜야 한다며 남산 국립극장을 서둘러 지었죠. 첫 공연으로 일주일 동안 창극 ‘수궁가’를 올렸는데, 객석이 모자라 통로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어요. 대한민국이 생기고 이런 인파는 처음이라고, 당시 극장장이 창극단원들을 싹 데리고 명동에 가서 불고기 파티를 벌인 기억이 납니다.”
A : “나를 제일로 사랑하고 내 소리밖에 모르던 분이 바로 이병철 회장이에요. 내 소리를 일주일에 한 번씩 안 들으면 안 된다고 해서, 용인 별장에 가수 계수남·하춘화와 같이 가곤 했죠. 그땐 국악인들이 집도 절도 없을 땐데, 이 회장이 석관동에 집을 사 줘서 내가 국악인 중에 제일 먼저 자리를 잡았어요. MBC 전속으로 있을 때 TBC가 막 생겨서 그리로 옮겨오라고 하셨는데, 당시 MBC 이환의 사장도 국악의 흥망성쇠가 나한테 달렸다고 할 정도로 나를 좋아했거든. 의리 때문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바람에 그때 시청자들은 나를 보기 싫어도 매일 봐야 했을 겁니다.(웃음)”
“77년인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3시간 반 동안 춘향가를 완창한 적 있어요. 그렇게 오래 하는데 외국인들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지키고 앉았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지만, 말은 몰라도 감격으로 통한 것 아니었을까.”
Q : 요즘 젊은 소리꾼들 인기도 상당한데요.
A : “사람 가운데 사람이 있듯이 소리 가운데 소리가 있어요. 금방 찍어서 내놓는 사진보다는 사람이 공들여 그리는 그림에 값을 좀 더 줘야 하지 않을까. 시대가 너무 달라져서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지만, 판소리란 걸 그렇게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요즘엔 사람들이 그냥 즐기기만 하고 그 깊이를 전혀 알려고 하지 않잖아요.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알아도 ‘백견이 불여일습(百見不如一習)’은 모르죠. 보고 듣고 좋다고 끝내지 말고, 직접 실습을 해보면 깊이를 알게 될 겁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후략)’. 풍류 좀 아는 사람은 한 번쯤 읊어봤다는 단가 ‘사철가’의 일부다. 영화 ‘서편제’(1993)에서 배우 김명곤이 불러 더욱 대중의 사랑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조 명창이 스무살 무렵 직접 지은 노래란다. 사계절의 변화 속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무상을 관조하는 곡이다.
“무등산 원효사에 가 있을 때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인거유흔(人去遺痕·사람이 한 번 가도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이란 말이 가슴에 박혀 단가를 한 수 지어 봤죠. 사서삼경을 그때 다 뗐거든. 판소리를 제대로 하려면 지식부터 갖춰야 하니까요. 십여 년 전에 크라운해태 직원들 100명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다같이 북을 치며 ‘판소리 떼창’ 공연을 해서 기네스북에도 올랐지. 내가 그동안 안 나섰다고 나를 우습게 보겠지만, 관계없어요. 나는 이 세상을 누구보다 여한 없이 산 사람입니다.”
박정희부터 김대중까지 역대 대통령을 비롯해 온갖 유명인들과 어울린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과연 화려한 인생이다. 그중에서도 전국 방방곡곡의 검찰청에 초대받아 한학 강연을 다니던 시절의 모습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내 논리에 반한 검사장 팬이 많았다”고 한다. 든든한 검찰 인맥을 재판에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무살 무렵 ‘사철가’ 직접 지어
사실 가장 궁금한 건 긴 야인생활이었다. 그보다 더한 혐의로 실형까지 산 예술인도 명예회복을 한 터에 조 명창의 지난 20년은 가혹한 것 아닌가. 그는 “30년 넘게 많이 했고, 이제는 반듯이 앉아서 후배 양성하는 게 내 활동”이라면서도 “너무 억울해 죽을 생각도 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은 “부정을 바로잡다가 당했다”는 것이다.
“광주시립국극단장 시절 내가 만든 대회에서 부정이 있을 뻔한 걸 바로잡은 일이 있어요. 그때 덕을 본 사람이 나에게 사례를 하겠다며 우리 단원에게 돈을 맡겼다는데, 그 친구가 몰래 다 써버린 걸 나는 전혀 몰랐던 거죠. 무형문화재까지 반납하게 되니 양심에 찔린 그 친구가 뒤늦게 자백했지만 돌이킬 수 없더군요. 액수는 크지 않았어요. 경찰의 수사방식에 내가 대응을 잘못하기도 했고.”
Q : 왜 적극적으로 소명하지 않았나요.
A : “더 원통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살았죠. 5·18 때 죽은 사람들은 죄가 있어 맞아죽었나요.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형문화재만 반납했지 내 예술은 못 가져가니까요. 세상에는 옳은 일만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일도 함께 있는 거죠. 나는 떳떳한데, 그동안 언론에서도 아무도 내게 그에 대해 물은 적이 없어요. 이런 말 할 기회라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Q : 후배들이 문화재 복권운동을 하기도 했는데요.
A : “국악인으로 태어나 이 세상 최고 대우를 받고 살았어요.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그 이상 늙어 죽을 때까지 누리려고 하면 안 되죠. 그 바람에 나같이 제자 많이 기른 사람이 없기도 하고.”
그의 앨범에는 유명인들과의 기념사진 못지않게 제자들의 자필 편지도 빼곡했다. 한 제자가 그의 사철가를 붓글씨로 채운 합죽선은 예술 그 자체였다. 오랜만의 인터뷰가 불편했을 텐데도 마당까지 배웅을 나와 “만나서 행복했다”며 활짝 웃는 노장의 모습에 후배와 제자들의 지극한 사랑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국악의 흥망성쇠를 다 짊어진’ 조상현 명창의 명예가 아쉽게 느껴졌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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