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이 내 삶의 지표가 된다는 건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그는 늘 테이블 끄트머리, ㄴ자 모서리 자리에 앉는다. 사람들이 중앙으로 모시려 해도 한사코 사양하며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는 사람, 김장하 선생. '소심한 사람인가보군'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행동 패턴이지만, 때로는 행동 하나가 한 사람의 많은 걸 읽게 하는 수신호가 된다. 김장하가 그렇다.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시 동성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100억원이 넘는 돈을 수십 년간 끊임없이 기부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베푼 것에 비해 세간에 알려진 건 미미했다. 선생 스스로가 자신의 공적을 밝히길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고, 기부하고도 이름을 숨겨서였다. 1983년 세운 사학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아무 조건 없이 헌납했을 때도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는 인터뷰는 단칼에 모두 거절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등록금은 물론 하숙비와 생활비도 남몰래 지원했는데,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아서 그 규모 또한 미스터리로 남았었다.
남몰래 사람들을 돕다가 은퇴 후 조용히 살고 싶었던 그의 소망(?)에 변수가 생긴 건 지난 연말연초에 경남 MBC를 통해 방영된 2부작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다.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취재하고 김현지 PD(MBC경남)가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방영 직후 입소문을 타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설 연휴엔 전국으로 전파를 탔다. 그리고 7월10일 넷플릭스를 통해 릴리스되면서 다시 한번 김장하라는 인물의 삶의 궤적이 SNS를 통해 감동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중이다. 올해 11월 개봉을 목표로 《어른 김장하》의 영화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선한 영향력은 어떻게 전파되나
흥미로운 점은 《어른 김장하》의 취재를 김장하가 정작 허락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공식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고, 대화하다가도 자기 자랑이 될 법한 사안엔 입에 자물쇠를 채워버리는 인물의 삶을 어떻게 취재할 수 있었을까. 김주완 기자와 김현지 PD는 찾아오는 사람을 매몰차게 대하진 않는 선생의 성정을 공략했다. 선생이 참여하는 공식 행사를 카메라에 담고, 산책에 따라나서고, 안부 인사를 핑계로 찾아가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공식 인터뷰는 없지만, 선생의 몇몇 일상이 카메라에 담겼다.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두 사람은 김장하 선생의 삶을 증언해줄 주변 인물 100여 명을 만나기 시작했다. 김주완 기자는 이토록 많은 이로부터 적극적인 취재 협조를 받은 적은 없었노라고 회고한다. 실제로 방송 카메라에 적대적이던 사람도 김장하 선생 취재 중이라고 하면 호의적으로 돌변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장하라는 어른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는 듯, 자신들이 겪은 김장하의 미담을 쏟아냈다.
지역 신문 기자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취재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문화가 뻗어갈 수 있도록 열악한 극단을 지원하고, 평화기념사업회를 통해 불평등과도 싸운 선생의 지원은 사회·교육·문화·예술·인권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김장하는 말한다.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
취재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난 사실도 많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한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 수혜를 입은 '김장하 키즈'가 100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은 촬영을 통해 밝혀졌다.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진주 형평운동의 선구자 강상호의 묘에 비석을 세우는 비용을 후원한 익명의 '작은 시민'이 김장하였다는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을 법한 숨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발굴될 때의 놀라움과 감동이 다큐에 가득하다.
미담에 미담에 또 미담이 릴레이로 이어지다 보니, 얄궂은 생각도 불쑥 끼어든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빈틈 하나 정도는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괜히, 살아온 시대 환경상 가부장적인 면모가 있으리란 가설을 세워본다. 이 추측은 그러나 그가 여성 인권에 오랜 시간 투신해 왔다는 사실 앞에서 백기를 내리고 투항하게 된다. 선생은 여성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시대에 진주가정폭력상담소를 후원했으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 힘을 보탰다. 여성단체가 공개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사진 속에는 여성 회원들과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년의 김장하가 담겨있다. 유일한 남성이다.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의 삶
알다시피,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시민사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돈이 있으면 정치가 꼬이기 십상이다. 실제로 선생은 명신고등학교 설립 후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교사 채용 청탁의 위험에 노출됐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김장하가 스스로 내건 조건은 세 가지. 1. 내 친척은 한 사람도 안 쓰겠다. 2. 돈을 받고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겠다. 3.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 그런 그의 성정을 알 턱이 없는 한 국회의원이 김장하를 만난 자리에서 명신고등학교에 가게 된 아무개 교사를 확실하게 신경 써달라고 말한다.
김장하의 반응은? 바로 다음 날, 국회의원이 언급한 교사의 채용을 무효로 한다.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김장하가 왜 이리 까불어!" 며칠 있으니, 교육부에서 감사가 내려왔다. 세무조사도 시작됐다. 김장하의 약점을 찾으려 이 잡듯이 파고들었다. 이에 대해 김장하가 한 말이 압권이다. "그리 나오면 나는 오히려 쉬워요." 잘못한 게 없어서다. 들킬 게 없어서다.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어서다. "제일 내가 이 험한 세상 살아오면서 힘이 되었던 것은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거. 그게 하나의 큰 힘이 된 거죠."
김장하를 증언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인상은, 선생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쁜꼬마선충' 연구로 잘 알려진 서울대 이준호 교수는 "선생님이 어떤 지침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오신 그 과정 자체가 삶의 지표 같은 분"이라며 "내가 '학생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선생님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저희가 그분의 삶을 닮을 수 없어서 부끄럽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너무 신과 같으니까 부러워할 수조차 없다"고 고백한다. 선생의 70년 지기 친구는 김장하를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에 비유한다. '내가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것.' 그 어떤 보답도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삶을 선생은 그저 살아간 것이겠지만, 그 행보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누군가를 살아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급해야 할 인물, 김주완 기자다.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하는 인물을 넓게 조명하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끈질기게 만난 사람. 김주완 기자는 1991년에 김장하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당연히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공식 인터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한 인물을 넓고 깊게 조망하는 그만의 방법을 찾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실하게 만드는 걸까.
기자 생활 내내 기득권자의 비리와 악행을 폭로하고 비판했던 그는,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는 말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효암학원 이사장 고(故) 채현국 선생을 인터뷰로 만나면서 선한 영향력이 사회로 확산되는 기적을 봤다. 그리고 선한 사례를 발굴하고 보여주는 것 역시 기자로서 사회에 일조할 수 있는 일임을 깨닫는다. 《어른 김장하》는 그런 그의 취재 노선이 악(惡)에서 선(善)으로 방향을 틀어 울림을 안긴 기적의 순간이다. 단죄해야 할 것을 덮고 넘어갈 때 사회는 후퇴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때 사회는 덜 전진한다. 개인의 역사를 기록한 《어른 김장하》가 사회적인 기록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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